“대전 골령골·홍성 용봉산에 평화공원 그리고 기림비도”
“대전 골령골·홍성 용봉산에 평화공원 그리고 기림비도”
  • 황동환 기자
  • 승인 2021.07.14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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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용일 ‘충남유족회’ 차기 회장
이종민 회장과 인연으로 홍성유족회 활동
올해 합동추모제서 추대… 임기, 내년부터
1기 진화위 권고 미이행 산적… “할 일 많다”
2022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충남유족회 차기 회장을 맡게 된 김용일 홍성군유족회 사무국장. 그는 '용봉산 평화인권공원 조성'을 충남유족회가 해야할 주요과제라고 말한다. 사진=황동환 기자
2022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충남유족회 회장을 맡게 된 김용일 홍성군유족회 사무국장. 사진=황동환 기자

대전·세종 그리고 충남 15개 시·군 유족회로 구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충남유족회’ 차기 회장에 홍성군유족회 김용일 사무국장(59)이 추대됐다.

김 사무국장에 대한 차기 회장 추대는 지난 10일 홍성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엄수된 제17차 홍성지역 희생자 합동추모제‘에서 진행됐다. 그는 “총회 며칠 전 공감대가 형성된 듯 했다”며 “유족회 어르신들의 뜻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어려워도 한 번 해보겠다고 수락했다”고 말했다. 차기 회장 업무는 내년부터 시작한다.

홍성군 홍성읍이 고향인 그는 홍성군유족회 이종민 회장과의 인연으로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 김 회장은 6·25전쟁 발발 직후 광천읍 담산리 마을 한복판에서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회장의 부친(故 이강세)과 본인의 할아버지와의 인연도 들려줬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홍성군 옥암·남장·월산리에서 이강세 선생은 농민동맹의 핵으로, 제 할아버지는 노동동맥의 핵으로 활동했다. 그만큼 이 지역은 자주적으로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고, 그래서인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큰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성유족회가 결성된 게 2005년인데, 이듬해인 2006년 이종민 회장이 찾아왔다. 당시 내 손을 잡고 울면서 ‘30년 동안 미국에 피해 있었다. 나이 들어 돌아와, 어릴 때 기억이 나 찾아왔다’고 말하던 이 회장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그와 이종민 회장은 옥암리에 살았다고 한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5년 만에 끝났고, 지난해 2기가 10년 만에 다시 출범했다. 1기 진화위는 국가 사과를 포함해 종합 권고 20개, 개별 권고 356개를 관련 정부 부처에 권고한 바 있지만 2기 진화위 정근식 위원장은 “국가 사과를 포함한 1기 진화위 권고사항 중 아직도 이행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충남유족회의 숙제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충남유족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는 “대전 산내 골령골에 전국 민간인 희생자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부 안은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 그곳을 더 키워 자주와 통일, 평화와 인권을 담고 싶다”며 “용봉산 학살지에 충남 평화인권 공원을 만들고 싶다. 차근차근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구상 중인 기림비는 사진 속 '헝가리 제1차 세계대전 기념비'와 유사한 콘셉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유족회 제공.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구상 중인 기림비는 사진 속 '헝가리 제1차 세계대전 기념비'와 유사한 콘셉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유족회 제공.

특히 그는 회장 추대와 함께 유족회 어르신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기림비’다. 디자인은 소녀상 작가인 김서경·김운성 부부가 맡았다.

김 회장은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주요 원인을 미국에 예속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으로부터 작전권을 완전히 돌려받지 못한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의 당연한 권한인 군사주권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필자 주).

그는 “정전협정 후 소련은 이 땅을 떠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켜놓고 있다. 만일 미군이 정전협정 때 약속대로 이 땅을 떠났다면 그 때 기림비가 세워졌을 것”이라며 “마음 같아선 전국의 모든 학살지에 세우고 싶다. 그래야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국의 군사주권은 언제부터 행사되지 못했을까? 러일전쟁 직후 1907년 일제는 제3차 한일협약을 강요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정미7조약에는 비밀각서가 첨부돼 있었는데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이 운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1950년까지 작전권을 행사했던 3년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은 114년 전부터 이미 군사주권을 빼앗긴 채 지금까지 온전히 되찾아 오지 못한 세계사의 유례없는 독립국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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