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삶과 죽음의 권리가 국가에게 있다
[칼럼] 삶과 죽음의 권리가 국가에게 있다
  • 노진호 기자
  • 승인 2021.08.1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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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현 청운대학교 교수

셰익스피어(1564~1616년)의 작품 ‘햄릿’은 삶과 죽음, 선과 악, 복수와 성찰 등 인간 삶의 무수한 본질적 질문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구나.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죽어버려, 잠든다. 그것뿐이겠지. 잠들어 만사가 끝나 가슴 쓰린 온갖 심뇌와 육체가 받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바라마지 않는 삶의 극치. 죽어, 잠을 잔다. 잠이 들면 꿈을 꿀 테지. 그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팬데믹 시대의 현대인들은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까?

코로나19에 대한 일부 국가들의 지나친 대응은 음침하고 어두운 중세적 분위기가 연상된다. 역사 속에서 질병, 특히 전염병은 언제나 권력의 현상이었다. 권력이란 합리성이나 상식을 넘어선 힘의 행사이다. 그 중에서도 나병과 페스트는 권력 기술의 중요 모델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시대 네델란드 화가 피에터 브뢰겔(Pieter Bruegel·1525~1569년)의 그림 ‘죽음의 승리(Triumph of Death)’는 당시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공포를 잘 나타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갈보리 언덕 저 너머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환자들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나환자를 치유하는 기적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세 초기부터 십자군 전쟁 말기까지 유럽전역에서 저주받은 나환자 격리공간이 무수히 늘어났다. 나병의 소멸은 아마 오랫동안 시행된 모호한 의료행위의 결과보다는 오히려 격리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요즘 마스크는 일상생활이 됐다. 과거 흑사병 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의사 겸 성직자들이 썼다고 알려진 마스크는 사실 14세기가 아닌 17세기 사람들이 썼던 것이다. ‘로마의 슈나벨 박사(Doctor Schnabel Von Rome)’란 제목의 1656년 판화에 그려진 흑사병 마스크와 그것을 쓰고 있었던 의사 슈나벨의 다소 우스꽝스러우며 기괴한 모습은 새 모양 방독면을 쓰고 페스트 환자를 상대하던 의사의 복장이다. 부리 모양의 앞부분은 부패한 시신에서 나오는 냄새를 차단하기 위해 허브와 향신료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접촉을 완벽하게 금지함으로써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로 개인들의 분류가 이뤄지는 것이 바로 현 시점이다. 한 개인이 규칙을 잘 지키는지, 규정된 보건 수칙을 엄수하는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감시하고 평가한다. 현대 사회는 감시에 기초한 규율권력과 생체권력이 중첩돼 나타나는 사회이다. 규율권력을 역사적 형태들을 흥미롭게 분석한 미셀 푸코(Michei Foucault·1926~1984년)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을 생체권력이라 명명했다. 요즘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권리가 국가에게 있다. 삶과 죽음은 결코 자연현상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대상이 됐다.

인구는 과학적이면서 정치적인 문제이고 동시에 권력의 문제이다. 팬데믹 시대에 살 권리와 죽을 권리가 전적으로 국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의 질병을 모두 관장한다. 선진국의 코로나19 백신 독점을 통해 차별적 가해자가 되려는 경향도 스스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 안전해야 나도 안전하다.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얼핏 든 생각이다. 어려움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도 그럴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의 세계를 마주할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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