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에 시인이 된 이승구 예산군의회 의장
고희에 시인이 된 이승구 예산군의회 의장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9.07.2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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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산행하면서 영감 얻어 시집 ‘덕봉산 도라지꽃’ 펴내 
이승구 의장은 요즘도 의정활동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하루 5~7시간씩 신문과 책을 뒤지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요약한다.
이승구 의장은 요즘도 의정활동으로 몹시 바쁜 가운데서도 하루 5~7시간씩 신문과 책을 뒤지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요약한다. 시 공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그는 지난 15년간 500여편의 시를 썼다.

예산군의회 이승구 의장은 고희가 넘은 나이에 시인이 됐다. 그가 시인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올해 3월이다. 의정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썼던 시를 ‘덕봉산 도라지꽃’(도서출판 문화의힘)이라는 시집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펜으로 깊은 사유를 담아낸 시의 수준이 만만치 않음에 놀란 사람들은 그에게 시인의 칭호를 부여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신익선 시인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이승구 의장에 대해 믿기 힘든 일이라며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구의 시편 곳곳마다 이승구 삶의 역사를 이뤄가는 객관적 상관물인 만남의 대상으로 연(戀)이 존재하고 연(戀)이 산다. 선연하다. 남모르게 꾸준히 시 창작을 하여 왔다는 것은 이승구 내면이 잘 정돈되어 있음을 측정 가능케 하는 바로미터이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의 양이 일궈낸 고결한 열매이자 일회성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얼마나 경건하고 성실한지를 웅변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신익선 시인은 이승구의 시편에 치열한 땀방울들의 외침이 들어 있다며 “어떻게 매 시편마다 연(戀), 그 그리움의 빛깔과 그 그리움의 빛을 표출해낸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지난 15년간 이 의장이 틈틈이 쓴 시 70편을 선별해 올해 봄 '덕봉산 도라지꽃'이라는 시집을 냈다.
지난 15년간 이 의장이 틈틈이 쓴 시 70편을 선별해 올해 봄 '덕봉산 도라지꽃'이라는 시집을 냈다.

삶속에 소중한 연
진실된 마음 하나로
기쁨과 행복 넘쳐나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의미에서의
시작이고 만남이지만
귀하고 소중하며
아름다운 연으로

늘 함께할 수는 없지만
마음 깊이 흐르는 정과
말은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삶의 기쁨 아픔을 나누며
웃음과 눈물을 함께하는
참 따뜻한 삶의
연이고 싶습니다

-‘연(戀)’ 전문-

여기서 ‘연’은 사모한다는 뜻이다. 신익선 시인은 연모한다는 의미로서 이승구 시의 주요 모티브라고 설명했다. 특별히 시인 이승구가 연모하는 대상은 산이다. 그는 덕봉산을 매주 주말 이틀간 오르며 자연과 대화하고 사색도 하며 영감을 얻는다. 이번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가 덕봉산에서 시상을 떠올렸거나 산 자체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덕봉산 눈길 헤치며
봉우리 길목마다 추위도 잊은 채
산의 삶 끝에 매달린 낙엽 하나
산의 풍경 신비를 더한다
행여 못된 돌풍 만나 떨궈질까 아스라하다

-‘낙엽 하나’ 전문-

이승구 시인은 덕봉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덕봉산산행’이라는 5자를 머리글로 삼아 5행시를 즐겨 썼다. ‘덕봉산산행’이라는 5행시가 이번 시집의 3분의2를 차지하고 있는데 위 시처럼 완성도가 높은 서정시도 있지만 억지로 첫 글자를 맞춰 써야 하는 한계 때문에 교훈시로 그치거나 밋밋한 감정의 토로로 여운을 남기는 시가 많은 점은 아쉽다.

신문 읽고 요약하다 보니 시도 쓰게 돼

기자는 지난 19일 예산군의회에서 이승구 의장을 만나보았다.

-4선으로서 주민들로부터 꾸준히 지지를 받는 비결은.
“초심을 잃지 않고 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오니까 그렇게 되더라.”

-의정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나는 예산초교(46회)를 나왔으나 지금은 신례원에서 살고 있다. 원래 산업대가 있는 대회리에서 태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이사를 자주 다녔다. 내가 2살 때 6·25동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행방불명됐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누님과 함께 유구, 신촌, 대술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예산읍내로 다시 이사왔다. 당시 큰고모부가 예산군금융조합(지금 농협) 조합장이었는데 고모와 두 분이 사는 집에 얹혀살았다. 나는 그때 금융조합과 붙어 있던 예산초교를 졸업했다. 고모부도 정년퇴임을 하시면서 예산농고에서 영어를 가르치시던 윤규상 선생님 바로 옆집에 이사를 가게 돼 거기서 예산중학교와 예산농고, 예산농전을 졸업했다. 농전을 1회로 졸업한 나는 바로 서울에 가서 태권도 사범으로 2년간 활동했다. 그때 태권도 붐이 일어나 멕시코로 진출하려고 수속을 밟은 적이 있다. 그러나 고향에서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머니를 모실 형제가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예산에서 한 10개월 정도 농촌지도소에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옮긴 직장이 충남방적이다. 충남방적에 20년간 다니던 중 지방의회가 부활하면서 당시 이종성 회장이 군의원에 출마하면 좋겠다고 권유를 해 사직하고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나 정작 군의원이 된 것은 2006년부터다. 충남방적을 그만둔 후 주유소도 관여했지만 돈만 잃었다. 그 후 집에서 쉬고 있으니까 예산 출신 동창생인 오장섭 전 건교부장관의 부탁을 받고 지역구 사무국장을 5년간 했다. 그때 나는 그분에게서 정치를 배웠다. 처음에 도의원에 나가 떨어졌다가 그 다음 지방선거에 군의원에 나가 당선됐다.”

지난해 7월 제8대 예산군의회 개원식 후 동료의원들과 함께 한 이승구 의장(왼쪽에서 여섯 번째)
지난해 7월 제8대 예산군의회 개원식 후 동료의원들과 함께 한 이승구 의장(왼쪽에서 여섯 번째)

-시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늘 일기쓰기, 메모습관, 한자공부에 대해 강조하며 중점 지도를 했다. 그때부터 메모하는 습관이 들어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다. 시를 본격적으로 써왔던 게 15년 이상 된다. 그 동안 쓴 시를 정리할 새가 없었는데 예산문인협회 한고석 회장이 도와주면서 책을 내보자고 권유를 했다. 한 회장과 같이 정리해 놓고 보니 시가 500편 이상 되더라. 그 중 70편을 골라 책을 내고 3월 26일 출판기념회를 했다. 책을 내고 보니 안냈을 때보다 다르다.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으나 대신 글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생각이 더 깊어지면서 편안한 글이 안 나온다. 시를 써놓고 보면 맘에 들지 않아 지금 다른 책을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요즘도 주말마다 산행을 한다. 시간이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대로 코스를 정해 산에 오른다, 산에 전지용 가위를 갖고 다니는데 다른 나무의 성장을 가로막는 덩굴나무를 보면 잘라주기도 한다. 또 조그만 톱도 함께 갖고 다니면서 튀어나온 나무를 잘라서 등산객이 다치지 않도록 등산로도 정비한다. 나는 산을 오르면서 ‘덕봉산산행’으로 5행시를 계속 썼다.”

-시집을 내기 전에 다른 지면에 시가 활자화되거나 문예지에 투고한 적은 없나?
“안했다. 시 창작에 대한 수업도 받은 적이 없다. 내가 초선시절 의욕을 갖고 의정활동을 시작했지만 막상 군정질문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집행부를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처음에는 신문을 보고 스스로 공부했다. 의회에 들어오는 25개의 신문을 보고 필요한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크랩을 하고 한번 읽고 나면 다시 찾아 읽기가 어렵더라. 1년이 되니까 스크랩북이 가득 쌓여 보관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 기사를 복사해 한글로 저장해놓기 시작했다. 그것을 각 사업부서별로 내용을 나눠 저장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 끄집어내려고 하면 한번 읽어본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산 출렁다리 100만명 방문 기념식에서 이승구 의장
예산 출렁다리 100만명 방문 기념 행사에서 이승구 의장(왼쪽에서 네번째)이 황선봉 군수(다섯 번째), 홍문표 국회의원(여섯 번째)과 함께.

나는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그 내용을 축소하기로 했다. 2천자 쯤 되는 기사 내용을 200자로 축소해 핵심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읽어보고 막히지 않게 내용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게 됐고, 그러다 보니 시를 쓰게 됐다. 그것을 10년 이상 하면서 USB에 3만 건의 내용을 담아놨다. 기사 내용을 축소하는 작업이 하루 5~7시간 걸린다. 새벽이나 아니면 사무실에 나와 저녁시간에도 하는데 하루 7~10건밖에 못한다. 굉장히 힘이 드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료 수집을 안하면 안 된다. 과장급 공무원들이 20~40년 이상 근무를 한 행정 전문가들로서 일상생활만 하던 사람이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의원들은 공부해야 된다. 내가 하루 5~7시간 공부를 하니까 공무원들과 대화가 되더라. 핵심내용을 전달하고 대안도 제시할 수 있게 되자 그렇게 공부를 해왔던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산·홍성 통합론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은.
“예산·홍성 사이에 도청이 있다. 지금 홍성군민 일부가 서해선 복선전철 삽교역사 건립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가 내포신도시보다 홍성역이 더 먼 거리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상생하자고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면 안된다. 홍성·예산뿐만 아니라 나는 청양까지 하나로 묶어 통합시가 되어 살아가면 좋겠다. 청양은 예산이나 홍성보다 훨씬 인구도 적어 더 어렵다. 최소한 3개 군이 통합하면 20만 이상 된다. 물론 홍성·예산만 통합해도 인구가 20만 가까이 되지만 청양을 버려두면 안 된다. 나는 초선 때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당시 5대 군의원으로서 나는 통합에 찬성했다. 이 지역 어르신들이 그때는 통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지난 7대 군의원 시절 물어보면 통합론에 찬성하는 어르신들이 꽤 많았다.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서 홍성·예산은 통합해야 된다. 관광·농업·환경분야를 다 묶어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전에도 내가 그랬지만 홍성·예산이 통합하는데 욕심을 너무 부리면 안 된다. 시청은 예산에 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홍성군이 양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체육시설도 곳곳에 많을수록 좋지만 결과적으로 후세들에게 운영관리비가 늘어나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늘어나는 기회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통합해야 한다.”
 
앞으로 3년 후 계획에 대해 이 의장은 이제 나이도 있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 내려놓을 생각이라며 평생 직업으로 계속 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군수에 도전할 생각도 없다며 “황선봉 군수님이 잘 하시기 때문에 더 하셔야 된다”는 말로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승구 의장은 예산과 홍성 통합론에 적극 찬성할 뿐만 아니라 청양까지 3개군 통합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출렁다리를 방문한 청양군의원들과 함께 한 이 의장
이승구 의장은 예산과 홍성 통합론에 적극 찬성할 뿐만 아니라 청양까지 3개군 통합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출렁다리를 방문한 청양군의원들과 함께 한 이 의장(왼쪽에서 네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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