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독립운동가 선양사업회 릴레이인터뷰③] 이평구 (사)옥파이종일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충남독립운동가 선양사업회 릴레이인터뷰③] 이평구 (사)옥파이종일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
  • 장현호 기자
  • 승인 2022.12.0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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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선생 모르던 목사 … 그의 업적 알리는 선교사 돼
“옥파의 정신이 태안을 넘어 충남으로, 온누리로 퍼지기를”
이평구 (사)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옥파이종일선생은 독립운동계의 선구자”라는 한 마디로 옥파선생을 정의했다. 			         사진=장현호 기자
이평구 (사)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옥파이종일선생은 독립운동계의 선구자”라는 한 마디로 옥파선생을 정의했다. 사진=장현호 기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일부다.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존재형태와 기본적 가치질서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규정하고 있는 기본법인 ‘헌법’에서 알 수 있듯 우리 민족에게 ‘3·1운동’이 갖는 가치는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독자들께 질문을 던지겠다. 3·1운동에서 사용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해 배포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이 사람은 10년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독립운동가 선호도 조사에서 몇 위를 차지했을까? 10위 안에는 들었을까?

제시된 100명의 독립유공자 중 무려 53위에 그쳤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 민중 계몽과 인재 양성이 중요함을 느끼고 신문 발행과 교육 사업에 모든 정열을 쏟으며 선구자적 애국·애족의 정신 실천했던 사람. 옥파 이종일 선생이다.

이번에 만나볼 사람은 이종일 선생과 출신지가 ‘충청남도 태안’으로 같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평구 옥파이종일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의 이야기인데, 그는 태안에서 초·중·고를 다니며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지만 놀랍게도 이종일 선생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자랐다고 전했다.

이 상임이사는 목원대 신학과를 졸업한 뒤 목사로 지냈던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며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옥파 이종일 선생의 일대기를 접했다. 순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은 추모·선양의 기폭제가 되어 나를 지금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이종일 선생이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옥파선생의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세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 충남 독립운동가 학술포럼과 같은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며 “개별 기념사업체들이 자생력을 갖추고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충남도가 주관해 실시하는 독립운동가 포럼이 사료 발굴과 연구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며 “옥파이종일선생을 포함한 충남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도가 널리 퍼질 수 있는 방안이 지속적으로 강구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옥파이종일선생기념사업회는 옥파선생의 선구자적 정신을 국민들께 전하고 의식변화를 꾀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려 한다”고도 밝혔는데 “민중 계몽을 위해 신문 발행을 하셨던 뜻을 담은 ‘이종일 언론상 제정’을 비롯 그의 업적 발굴을 위한 연구활동과 홍보를 위한 기념행사들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상임이사는 “옥파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그의 업적은 태안에만 갖혀있었다”며 “이종일 선생이 보여준 선구자적 정신을 충남부터 시작해 온누리에 퍼뜨리기 위한 노력들을 펼칠 계획”이라고 끝맺었다.

옥파 이종일 선생
1858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이상재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82년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와 정3품의 위계를 받았다. 1898년 대한제국민력회 회장, 제국신문사 사장이 됐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 ‘천도교회월보’의 월보 과장,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3·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서명했다. 이로 인해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했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위나 가정은 돌볼 겨를이 없었던 그는 1925년 영양실조로 아사 순국했다. 그는 오직 나라의 부강과 독립, 안민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다방면에 걸친 옥파 이종일 선생의 애국적 활동은 그 영향력이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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