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유효기간이 없다(9·끝)
정의는 유효기간이 없다(9·끝)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9.08.14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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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쟁이가 일부로 전화를 안 받는군.”

정 의원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는 조용히 떠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의원님과는 오늘 마지막 인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서 선배가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서 기자, 가족도 있을 텐데 갑자기 실직자가 되면 생활은 어떻게…?”

정 의원이 따라 일어서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으니 최소한의 생계는 몇 달 간 보장되잖아요. 좀 쉬면서 새 직장을 찾겠습니다.”

“그래. 서 기자는 실력 있는 경력자니까 더 좋은 데 갈 수 있을 거야. 보다 안정된 언론사에 가서 정의의 펜을 맘껏 휘두를 수 있으면 좋겠어. 그나저나 청룡구를 충실하게 견제하고 감시했던 정의의 펜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새청룡신문의 민 기자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나?”

정 의원이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아닙니다. 구청에 찍혀 밥줄 끊기면 큰일 나게요.”

나는 손을 강하게 흔들며 대꾸했다. 갑자기 나의 눈앞에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고 있는 진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청룡신문은 1년 전 오랜 백수생활을 면하게 해준 직장이어서 잘 붙어 있어야만 했다.

“요즘 지역 분위기가 심상치 않지?”

정 의원의 방을 같이 물러나오면서 서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청룡동 주민들의 반발이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알리고 대안을 제시할 언론인은 선배님뿐인데….”

“대안이 따로 있나. 구청장이 주민들을 속인 것 공개사과부터 해야지. 주민들도 환상을 버려야 해. 청룡산을 자연 그대로 보호하는 것이 최선인데 구청에서 헛된 망상을 심어줬으니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지. 그나저나 난 이제부터 기자 신분도 아니고 어용언론으로 전락한 푸른용뉴스에 부담을 줄 수도 없어 이 지역을 어서 떠나야겠네.”

“선배님, 너무 섭섭합니다. 참, 어디 카페에 가서 차나 잠깐 한 잔 하시죠? 제가 커피 살게요?”

“난 조용히 청룡구를 떠나고 싶어. 내가 민 기자한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나?”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보내 드리기로 했다. 구의회 청사 현관에서 마지막 악수를 나누는 순간 얼른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2주 전 구청 기자간담회에서 받았던 1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이었다. 진희의 생일을 위해 그대로 아껴두고 있었는데 당장 실직자가 될 그를 위해 건네주고 싶었다. 하지만 찜찜한 생각이 들어 그것을 꺼내지 못했다. 서 선배가 그것의 출처를 눈치 채고 구청을 고발하기라도 한다면 나까지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결국 나는 그를 빈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떠나보낸 후 구의회 현관 로비의 소파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사흘 앞으로 다가온 진희의 생일을 위해 무엇을 선물로 사야 할지, 아니면 상품권을 그대로 주는 것이 좋을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영란법을 빌미로 서 선배에게 그것을 건네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는 형편에서 그마저 없다면 진희를 위한 생일선물을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 결혼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쏟아지는 졸음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 후 바깥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아득하게 들리던 풍물패의 타악기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으로 나가보니 구청 앞 광장에 50여 명 쯤 되는 주민들이 몰려와 시위를 하고 있었다.

“청룡동 주민들을 기만한 임종팔은 물러가라!”

“임종팔은 청룡랜드 조성사업 공약대로 추진하라!”

구호가 그치자 풍물패가 앞에서 원을 그리며 신바람 나게 풍악을 울렸다. 그 뒤에 열을 지어 선 주민들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박수로 장단을 맞췄다. 그러다가 잠시 풍악이 멎으면 주동자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쳤다. 나는 잠자코 지켜보다가 카메라를 꺼냈다. 모처럼 직업의식이 발동한 셈이었다. 아직 주위에는 나 말고 취재하는 기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민원업무를 보러 온 주민들이 시위대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바쁘게 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때 내 앞으로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다가와 유인물을 건네주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청룡동 주민들이 임종팔 씨의 공약을 보고 압도적으로 지지해서 당선시켜 줬더니 이게 뭡니까. 기자님, 있다가 우리 대책위원장님과 인터뷰 좀 하세요.”

“네!”

“우리 위원장님은 저기 앞에 있는 저 분이에요.”

40대로 보이는 부인은 구호를 선창하며 시위대를 지휘하고 있는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한 사내를 가리켰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은 했지만 사진만 몇 컷 찍고 바로 그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눈높이로 치켜드는 순간 매우 낯익은 얼굴들과 마주쳤다. 주민대책위원장의 뒤 쪽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는 사람들 가운데 구청 홍보실 직원들이 있었다. 이상남 팀장과 송주현 주임의 시선이 시위대와 함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는 모습이 분명했다. 나의 몸은 갑자기 마법에 걸린 듯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겨우 몸을 움직여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내 곁에서 시위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서경만 선배였다. 그가 늘 가지고 다니던 묵직한 DSLR 카메라가 아니라 납작한 직사각형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아까 떠나기 전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묻고 싶었다. 서 선배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먼저 나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해명했다.

“민 기자, 그냥 귀 막고 눈 가린 채 이 동네를 떠나려고 했는데 저 풍물패 소리가 무슨 마법처럼 주문을 걸어왔어. 그래서 되돌아왔어. 정의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누구한테도 간섭을 받지 않는 시민으로서 내가 뭘 못 쓰겠나….”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맞은편을 곁눈질로 살폈다. 홍보실 직원들이 여전히 우리를 향해 바라보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서 선배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위치를 옮겨 가며 시위대의 모습을 부지런히 촬영했다. 검은 선글라스의 여인이 서 선배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발길을 돌렸다.

“청룡랜드 백지화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

나의 등 뒤로 꽹과리의 장단에 맞춰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손에 잡힐 듯 도시를 감싸고 있는 청룡산 꼭대기 위로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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