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만 도의원, ”인생은 의지의 투쟁“
조승만 도의원, ”인생은 의지의 투쟁“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9.09.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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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노동하며 독학 ‘격물치지’ 터득 도전하는 인생 
조승만 충남도의원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건설현장에 나가 노가다를 하면서 독학을 해 대입검정고시를 합격했다.
조승만 충남도의원은 늘 미소를 잃지 않은 밝은 얼굴이 트레이드 마크다. 고생을 전혀 안한 사람 같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했던 고난의 행군으로 점철된다.

조승만(더불어민주당·홍성1) 충남도의원은 늘 미소를 띤 밝은 얼굴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러나 그는 귀공자 타입과는 거리가 먼 가난을 온몸으로 체험해야 했던 유년기의 추억이 있다. 중학교만 가까스로 졸업하고 일찍이 노동판에 뛰어들었던 그는 학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낮에 일하고 몹시 피곤한 가운데서도 밤마다 강의록으로 고교과정을 공부했다.

영어와 수학은 혼자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 의원은 중학교 은사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받았다. 영어는 어느 선배가 빌려준 ‘안현필의 영어실력기초’라는 참고서를 보고 공부했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와 숙어는 마분지를 잘라 만든 단어장에 적어 무조건 외웠다. 낮에 일터에 나가 일하면서 그는 단어장을 찢어가며 암기했다고 회고한다. 수학은 중학교 선배나 홍성고에 다니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이 같은 노력으로 그는 열아홉 살 때 대입검정고시에 거뜬히 합격했다.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는 이듬해 대입대신 지방공무원시험에 도전했다. 다행히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나이 스무 살, 그는 홍성군청 말단 공무원으로 새 출발했다. 형편이 좋았다면 대학에서 맘껏 학문을 연구하면서 더 큰 꿈을 꾸었겠지만 박봉이나마 매달 받으며 공복으로 봉사하는 삶을 일찍 선택한 것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인생은 의지의 투쟁입니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홍주향교에 가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 배웠는데,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지식에 이른다는 뜻이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노력을 통해 인생은 의지의 투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 의원은 청소년기에 깨우친 ‘격물치지’를 좌우명으로 삼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사자성어에서 그가 이해하기 쉽게 발전시킨 말은 ‘인생은 의지의 투쟁이다’라는 잠언이다.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학구파였다. 공무원 시절 무슨 시험이든 치르고 나면 일등으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영어도 꾸준히 공부를 해 지금도 외국인을 만나면 자신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홍성군의회 사무과장 시절 그의 영어 실력이 빛을 발했다. 도내 시·군의회 사무과장들이 단체로 해외연수를 갔을 때 그는 통역 역할까지 했다고 회고한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동영상 강의를 수없이 접할 수 있지만 그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 같은 프로그램이 흔치 않았다.

“옛날 독학하던 시절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극동방송에 영어 독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때 손길영 박사가 영어 독해를 가르치는 방송을 듣고 공부를 했습니다.”

극동방송은 예나 지금이나 라디오 방송만 하는 곳이지만 그 시절 그에게는 귀로 듣는 강의만으로도 흡족한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입학해 학사학위를 받은데 이어 공주대학교 행정학석사, 한서대학교 문학박사학위를 차례로 받았다.

공무원을 정년퇴임한 후에는 주변의 권유로 충남도의원에 도전했다. 지난해 지선에서 당선된 뒤 지금 활발하게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공무원을 정년퇴임한 후에는 주변의 권유로 충남도의원에 도전했다. 지난해 지선에서 당선된 뒤 지금 활발하게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조승만 도의원.

조 의원은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다. 2004년 8월 그가 주도해 홍성군청과 홍성군교육청 직원 35명이 의기투합해 ‘나눔봉사회’를 만들었다. 나눔봉사회는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장애인 가정과 독거노인 가정 방문, 청소 및 집수리를 비롯해 복지시설 위문, 목욕봉사, 환경보호활동 등을 전개해 왔다.

“지금도 저는 틈난 나면 같이 참여해 봉사합니다. 제가 군청 공무원 시절 나눔봉사회를 창립한 것은 ‘앞만 보고 가지 말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21살의 나이로 징용을 가서 3년 동안 고생하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징용을 가서 일하던 탄광 안으로 물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광부들이 갱 안에 물이 찰까봐 다 도망가 버렸는데 아버지만 혼자 남아서 가마니때기로 물을 막아 다른 동료들까지 다 살리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그 얘기를 하시면서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을 살펴보며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요즘도 의정활동으로 바쁜 가운데서 나눔봉사회가 봉사하는 날은 꼭 참여하고 있다. 자신도 어린 시절 궁핍한 생활을 뼈저리게 체험해 봤기에 늘 그때를 생각하며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간다.

"도의원을 하면서 더 열심히 뛰고 더 열심히 연구해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의정활동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봉사, 따뜻한 봉사. 도민과 군민을 위한 봉사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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