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진석 어르신, 팔순 황혼기에 시인 데뷔
채진석 어르신, 팔순 황혼기에 시인 데뷔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9.10.10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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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광시면 노전리 초야에 묻혀 시의 텃밭 가꿔 
채진석 시인은 평생 시와는 거리가 먼 직업에 종사하다가 팔순이 넘어서야 시인으로 데뷔했다.
채진석 시인은 농촌에 돌아와 황혼기를 보내면서 책을 읽는 여유를 즐기고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메모를 하다가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이재인 관장을 가까운 이웃으로 벗하면서 동기를 부여받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 시인이 됐다.

팔순 어르신이 시인으로 데뷔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에서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채진석(85) 시인이다. 

그림같이
차 한 잔 앞에 놓고
마주앉은 우리

둘이 눈빛 마주하는 것으로
족한 우리, 우리는

우산 하나 받쳐 쓰고
해변을 걷는다

파도를 헤치고
아스라이 멀어지는
돛단 어선을 그린다
뱃고동 소리도 그린다

눈빛으로 창문에 그린다
빗물로 그린다

-채진석의 ‘보슬비 내리는 날’ 전문-

그는 최근 ‘국제문학’에서 ‘보슬비 내리는 날’과 함께 ‘나의 기도’, 이 두 편의 시를 추천받아 인생 만년에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재인 심사위원장은 채 시인의 시에 대해 “신인작가 답지 않게 성숙도를 나타내는 서정시”라며 “오늘날 젊은 시인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기교가 세련됐고 연륜이 깊고 많은 사유를 통해 빚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달 26일 기자는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한국문인인장박물관에서 채 시인을 만났다. 채 시인의 집은 박물관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에 그가 자주 놀러 오는 곳이다. 이재인 관장과 다정한 말벗이 되어 주는데 점심 때가 되면 가까운 광시면 소재지 한우먹거리타운에 나가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한다.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이 관장은 그에게서 잠재된 재능을 발견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늦깎이 시인이 되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채 시인은 그 동안 문학과 거리가 먼 인생길을 걸어왔다. 1935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꼬박꼬박 받아오는 월급으로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텨였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아버지가 실직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고위 공무원을 지냈다는 이유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친일로 낙인찍혀 해직된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후 낚싯대를 들고 전국으로 피해 다니셨어요.”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1956년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2학년에 다니던 중 육군 사병으로 입대를 한 그는 막상 제대 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복학할 수 없을 만큼 집안형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군대에 좀 더 눌러 앉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다행하게도 국방부에서는 부족한 지휘관을 늘리기 위해 1년의 단기 과정으로 장교 교육을 시키겠다며 사병들 중에서 지원자를 찾았다. 

“당시 장교가 되면 쌀 한 가마 값의 월급을 받았어요.”

결국 그는 장교가 됐다. 5년간 의무복무를 하도록 돼 있었지만 그는 가능하면 군대에 말뚝이라도 박고 싶었다. 5·16 쿠데타로 박정희 장군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계속 행운이 따랐다.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면서 장교들의 할 일이 많아지자 그에게도 장기 복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는 사병시절부터 보직도 좋았다고 회고한다. 대학물을 먹은 데다가 글씨도 잘 써 줄곧 행정병으로 근무를 했다. 

“당시만 해도 무학력자가 많았어요. 사병들 가운데 문맹자도 많아 내가 대신 편지를 써주기도 했죠.”

그는 장교가 된 후에도 인사과에서 줄곧 근무했고, 나중에는 인사과장까지 했다. 1968년 월남전에 파병된 그는 거기서도 인사과장을 맡았다. 그것도 비전투부대인 군수지원부대에서 14개월간 근무했다. 

“저는 아무 백도 없었는데 운이 좋았어요. 후방인 퀴논에 주둔하면서 물자를 관리하고 병력들 자리 배치하는 일을 맡았지요.” 

국내로 철수한 후에는 대전 6관구사령부에서 마지막 군생활을 하고 15년 만에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대위로 예편한 후에는 옛날 모셨던 장군들이 주택공사, 도로공사 등 공기업에서 사장으로 활동하며 불러줘 간부로 잠깐 일하다가 나와서 건축업을 했다. 

군대에서 졸병 때부터 행정반 일을 하면서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행정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서울에서 사업을 접고 예산으로 귀촌한 후에는 홍성읍에서 행정사무소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든 사업을 접고 광시면 노전리 초야에 묻혀 소일거리 삼아 약간의 농사를 하며 독서를 즐기고 시를 쓴다. 집 근처 이웃에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이 있어서 그에게는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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