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 ‘귀주’와 같은 지명인데 용어통일 필요
구주, ‘귀주’와 같은 지명인데 용어통일 필요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9.11.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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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지역 진주강씨 문중, 강민첨 장군 대첩 천년기념 학술대회
기조발제자이자 좌장을 맡은 공주대학교 윤용혁 명예교수가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기조발제자이자 좌장을 맡은 공주대학교 윤용혁 명예교수(왼쪽에서 세 번째)가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구주대첩 1천년을 기념해 승장 강민첨 장군의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진주강씨은열공대종회예산재(재장 강운식)는 10월 31일 오후 예산문화원 대강당에서 예산역사연구소(소장 박성묵) 주관으로 ‘고려개국공신 강민첨 장군 구주대첩 천년맞이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예산지역 진주 강씨 문중 후손들과 지역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가 ‘강민첨 장군과 구주대첩 천년’에 대한 기조발제로 학술발표를 시작했다.

윤 교수는 “구주대첩과 관련해 당시 상원수였던 강감찬 장군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부원수로 출전한 강민첨 장군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 않다”며 “그러나 누구보다도 큰 전공을 세운 사람은 강민첨 장군이었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강감찬과 함께 강민첨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고려사’의 구주대첩 관련 기록을 인용하면서 “그 공을 인정받아 1019년 3월 응양군 상장군에 오르고 12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의 직과 추성치리익대공신호(推誠致理翊戴功臣號)를 받았으나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강민첨 장군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윤 교수는 “강민첨 장군이 1천년 전 누란의 위기에서 고려왕조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며 “본래 과거에 합격한 학자 출신으로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라에 충성하는 선공후사의 정신으로 매사에 주어진 공무에 충직했기 때문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진주강씨은열공대종회 강운식 예산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진주강씨은열공대종회 강운식 예산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어서 강동욱 박사(진주교대 경남권문화연구소)의 ‘은열공 강민첨 장군의 공적과 현창 양상 고찰’, 박성묵 예산역사연구소장의 ‘강민첨 장군 묘역의 문화유산 가치와 활용방안’에 대한 발제가 있은 후 김학로 원장(당진역사문화연구원), 손세제 박사(홍주향교), 박창원 교수(충남도립대학교)가 패널로 참여해 활발하게 토론을 벌였다.

앞서, 1부 기념식에서는 강운식 재장이 인사말을 통해 “구주대첩 승전 천년을 맞아 은열공의 후예로서 처음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이번 행사가 역사 문화적 의미를 확인하고 나라사랑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문중을 넘어 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역 인사로서는 대회 장소를 제공한 김시운 예산문화원장이 축사를 했으며, 문중에서 강창근 진주강씨중앙종회장과 강동만 진주강씨은열공대종회장이 격려사를 했다.

윤용혁 교수는 좌장을 맡아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같은 한자로 두 가지 음을 가진 거북 구(龜, 혹은 귀)의 머리글자 지명에 대해 “보통 귀주대첩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 구주대첩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하다”며 “어느 쪽으로든 용어 통일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행사를 마치고 참석한 진주 강씨 문중 후손들이 발제와 토론을 맡았던 인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주로 예산지역 종친회에서 많이 참석했지만 멀리 경남 진주에서 온 문중 인사들도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참석한 진주 강씨 문중 후손들이 발제와 토론을 맡았던 학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주로 예산지역 종친회에서 많이 참석했지만 멀리 경남 진주에서 온 문중 인사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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