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수 회장, 충남시대·충남시대뉴스 창간
방정수 회장, 충남시대·충남시대뉴스 창간
  • 허성수 기자
  • 승인 2020.01.31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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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언론 필요 홍성에서 3월부터 도일간지 발행
방정수 회장은 온양 방씨 43세손으로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종가를 지키며
방정수 회장은 온양 방씨 43세 종손으로 차남이지만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종가를 지키기 위해 33세 때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로 낙향해 건설업으로 성공한 향토기업인이다.

홍성에서 충남도를 커버하는 온·오프라인 일간신문이 창간된다. 새해 초 ‘충남시대’라는 제호로 충남도청에 등록된 일간지가 3월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 

홍성 출신 향토 기업인 방정수 청림건설 회장 주도로 지난 1년 동안 신동찬 씨, 김진호 전 대전일보 기자, 채현병 전 홍성군수 등 지역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참여해 창간 준비작업을 해왔다.

■도민이 만드는 신문 지향

방정수 회장은 충남시대를 창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지역에 올곧은 언론을 만들고 싶습니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후배들을 정치·사회·경제 등 각 분야에 진출할 인재로 키우기 위해 충남시대를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충남시대의 편집 방향에 대해서는 도민의 참여를 강조했다. 
“충남시대는 도민이 만드는 신문을 지향합니다. 도민의 애로사항, 도민이 바라는 사항을 담아 도민과 같이 만드는 신문을 지향하겠습니다. 이것이 충남시대 신문을 창간하는 기본 취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훌륭한 인재를 키워 지역사회 발전에 보탬이 되게 하겠습니다.”

오프라인 신문인 충남시대는 일간지로서 주 3회 이상 발행해야 하지만 도내 전 시·군에 지사가 설립될 때까지는 주 2회 발행한다. 취재권역도 홍성군과 예산군, 내포신도시 위주로 본사가 위치한 지역에 우선 집중하게 된다. 이를 위해 2월중 기자모집을 해 3월초에 차질없이 신문을 발행할 계획이다. 본사 편집국은 홍성읍 내포로 54번지, 현재 청림건설이 있는 건물 3층에 마련했다.  

충남시대는 온라인신문 충남시대뉴스(www.icnsdnews.com)도 창간한다. 충남시대뉴스는 한 달 앞서 2월 초부터 운영할 계획이다.

충남시대 경영진은 방정수 회장을 중심으로 과거 지역에서 국회의원과 군수 출마 이력이 있는 정치인 신동찬 씨가 사장으로 선임됐다. 

충남시대 회사 로고.
충남시대 회사 로고.

■구항에서 온양 방씨 종가 지키는 종손

충남시대 창간을 주도한 방정수 회장은 작은 체구에 배포는 한없이 큰 ‘작은 거인’으로서 일찍이 건설업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온양 방씨 43세 종손으로서 홍성군 구항면에서만 18대를 살아왔다고 한다. 구항면 내현리 거북이마을이 조상 대대로 500여 년 동안 살아온 고향으로 지금도 종가를 지키는 막중한 사명감과 함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고향을 떠나 공직생활을 하다가 종가를 지키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33세의 나이에 낙향했습니다.”

그는 둘째 아들로서 형이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특별히 자신을 총애하면서 종손의 임무를 부여했다고 한다. 

“그때 사회초년생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유언을 어기지 않으려고 잘 나가던 공직생활 다 포기하고 낙향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 많이 했습니다. 도회지 생활하다가 갑자기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무척 힘들었지요.“

그는 젊은 시절 홍성으로 돌아와 종가를 지키며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홍성은 개발 붐이 일면서 그의 사업은 시작부터 날개를 달았다. 지역에서 처음으로 아파트를 짓는 등 여러 세대가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불편하고 옹색한 전통가옥에 살아왔던 주민들에게 넓고 편리한 구조의 서구식 주거 문화는 인기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집을 지으며 돈을 벌었다. 

80년대 후반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되면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그는 서슴치 않고 입당했다. 당에서는 30대 청년 당원으로서 패기만만했던 그에게 농어촌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겼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면서 치른 첫 지방선거에 그는 첫 도전을 했다. 홍성군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꾸준히 재기를 꾀했으나 좀처럼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 터진 IMF환란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는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재기를 위해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없었다. 대신 정치적인 야망을 접었다. 어서 경제적으로 회복해야만 종가를 지킬 수 있는 여유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청림건설은 IMF의 악몽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설립했는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인 이순자 여사를 대표이사로 내세우고 방 회장이 튼튼하게 기반을 다졌다. 

“집사람이 종부의 아내로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아내 때문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기에 늘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충남시대 창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준 김진호 전 대전일보 기자와 함께.
충남시대 창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준 김진호 전무이사와 함께. 

방 회장은 지금도 아내가 토요일마다 일곱 벌의 옷을 빨고 일요일에는 그 일곱 벌을 다림질 해놓는 등 자신을 잘 뒷바라지한다며 감사를 표했다. 사업도 회복을 해 지금 홍성에 기반을 둔 청림건설과 충남장묘문화사 외에 강원도 등 외지에도 서너 개의 법인이 있다. 

함께 운영하는 장묘문화사는 그가 종손으로서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이 남다른 주특기가 되어 이웃의 주목을 받게 되자 창업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종중묘를 관리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잘 한다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사업으로 해봐도 좋겠다고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전국을 다니면서 풍수지리도 봐주고 산소 터를 잡아주고 만들어주는 등 많은 묘를 관리해주고 있습니다.”

종가 며느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요즘 제사상 차리는 일이 젊은 여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지만 그의 아내는 당연한 사명으로 여기며 기쁘게 감당하고 있다. 

“집사람은 종가 며느리로서 명절 때마다 혼자 제사상을 다 차립니다. 우리는 손수 차례음식을 다 장만합니다.”

요즘 손쉽게 주문할 수도 있지만 직접 음식을 만들어 조상에게 바친다며 아내에게 거듭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홍주향교 장의이기도 한 그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와 관습을 아쉬워하면서 젊은이들의 인성교육을 위해 유교의 예절을 널리 가르칠 수 있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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