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익채, 홍성지역 역사유적 발굴의 대가
복익채, 홍성지역 역사유적 발굴의 대가
  • 허성수 기자
  • 승인 2020.02.0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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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청난사, 기봉사, 백제부흥군 위령제 등 각종 제향 부활
복익채 회장은 홍성지역에서 향토사의 대가로 많은 유적을 발굴하고 제향을 부활시켰다.
복익채 회장은 홍성지역에서 향토사의 대가로 많은 유적을 발굴하고 제향을 부활시켰다.

내포문화연구연합회 복익채 회장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은인처럼 생각하며 추모했다. 복 회장이 향토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바로 대우그룹에서 지원하는 학술사업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김우중 회장은 향토사를 포함해 기초학술 연구 발전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학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1984년, 그때만 해도 잘 나갔던 대우그룹은 서울역 앞에 대우재단빌딩을 세우고 주말마다 학술단체들에게 모임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곤 했는데 복익채 회장도 이 무렵 이곳을 출입하면서 내포지방 향토사 연구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1973년 우리 고장에 중요한 역사 유적이 없어질 뻔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간첩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홍성 백월산 꼭대기에 있는 만전묘가 철거 대상이 되었어요. 그곳은 청난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경찰이 부수려고 했으나 무속인들이 막았죠.”

면천 복씨 가문을 빛낸 효자 복한의 묘.
면천 복씨 가문을 빛낸 효자 복한의 묘.

청난공신이란 1596년(선조29) 임진왜란 때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에게 내린 훈호(勳號)로서 홍가신·박명현·최호·신경행·임득의 등 5명을 말한다. 철거 위기를 면한 후 1989년 그곳에 ‘홍주청난사’라는 사당이 건립됐다. 

복익채 회장은 홍성 홍북 출신 최영 장군의 사당을 짓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4년 내가 당시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총무를 맡고 있었는데 홍성읍 복개주차장에 인간신으로서는 전국 최고의 신인 최영 장군 영신제를 했습니다. 그때 참석한 후손들에게 사당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200만원을 기부하더군요.”

복 회장은 최씨 대종회에서 받은 기부금과 함께 군비로 최영 장군 사당을 지을 수 있게 했다고 회고했다. 기봉사는 1995년에 건립됐으나 제사는 10년 동안 지내지 못했다. 이것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복 회장은 2006년 총주청난사와 기봉사 제사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군비를 요청했다. 당시 군에서 1천만원을 흔쾌히 지원해 청난5공신과 최영 장군을 기리는 제사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1995년에는 만해 한용운 만해제도 내가 시작을 했습니다. 문화제를 하게 되면 고유제를 먼저 해야 되는데 그때 홍주향교에서 이를 위해 15만원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만해가 스님이니까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었죠.”

복한 선생의 생가터 근처에 보존된 모쟁이샘이다.
복한 선생의 생가터 근처에 보존된 모쟁이샘이다.

복 회장은 곧바로 수덕사를 찾아가 주지 법장 스님을 만났다. 법장 스님은 만해가 자신이 존경하는 스님이라며 흔쾌히 허락을 했다. 

“만해 생가에서 만해제를 하던 날 12km나 떨어진 수덕사에서 스님 76명이 왔습니다. 새파란 장삼을 입은 스님들의 행렬은 장관을 이뤘죠.”

홍성 장곡산성에서 백제가 패망할 무렵 부흥운동을 벌였던 백제군의 원혼을 위한 제사도 그가 부활시켰다.

“1994년에 박성흥 선생이 장곡산성이 백제 부흥운동이 벌어진 주류성이라고 처음 발표를 했습니다. 장곡산성이 주류성이 확실하면 위령제를 지내야죠.”

복한의 부친 복위룡의 사당.
복한의 부친 복위룡의 사당.

가까운 예산 임존성에서는 백제 부흥군의 거점 중 하나로 이미 인정을 받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었다. 복 회장은 1996년 장곡산성에서 처음 위령제를 지냈다. 그 후 지금까지 연례행사로 실시되고 있다. 

1997년에는 장곡면 월계리에 최치원의 금석문이 발견되면서 고운 선생 제사와 청산리대첩을 승리를 이끈 갈산면 출신의 김좌진 장군 제사를 시작한 것도 복익채 회장이다. 

“당시 내가 홍성문화원 사무국장을 할 때였어요. 1997년 12월 25일 백월 김좌진 장군 제사 처음 지냈습니다. 사당을 지으려면 제사를 먼저 지내야 하는데 그때 668만원의 돈이 들어왔습니다.”

전국에 엽서 1700통을 보낸 결과 답지한 기부금 668만원으로 첫 제사를 지냈다고 복 회장은 회고한다. 그 후 홍성군은 2001년 김좌진 생가지에 백월사를 지었다. 

복익채 회장은 면천 복씨 가문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을 해냈다. 그가 가장 보람된 일로 꼽는 것이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의 사당을 복원한 일이다. 원래 복 장군의 사당이 없었다. 그러나 후손으로서 그의 흔적을 찾아 증거자료와 함께 당진시에 제출해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2009년 당진시 면천에 복지겸 장군의 사당 무공사가 완공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극진히 효를 다했던 복한의 정려비가 보존된 성효각이다. 금마면 신곡리 복 회장의 집 바로 뒤에 있다.
아버지에게 극진히 효를 다했던 복한의 정려비가 보존된 성효각이다. 금마면 신곡리 복 회장의 집 바로 뒤에 있다.

이뿐만 아니다. 홍성군 서부면에서 조선시대 결성현감을 지낸 김자(金滋) 묘비를 찾아 그의 후손들을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김자는 1408년(태종8년) 서해안에 침범한 왜적을 크게 물리쳤는데 그의 공적이 결성면 관아지에 세워진 공적비와 결성현지에 기록돼 있다.

2008년 서부면 신리 모산도공원에 김자의 승전비가 세워진 후 홍성군의 지원을 받아 결성향교 주관으로 경주 김씨 수은공파 대종회와 함께 매년 승전일인 음력 3월 8일을 기해 승전제를 지내고 있다. 

복 회장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금마면 신곡리 한적한 시골마을로 집 뒤 동산에는 성효각(誠孝閣)이 있다. 성효각은 조선 태종 때 효자로 유명한 구암(久菴) 복한(卜僩, 1350-1427) 선생의 정려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39호로 면천 복씨 가문을 대신해 복 회장이 관리한다. 

그의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축사를 가리켜 복 회장은 복한 선생의 생가지라고 했다. 바로 근처의 논 가에는 복한이 식수로 사용했던 모쟁이샘이 보존돼 있었다. 다행히 샘 주변에 가까운 친지로부터 50평의 땅을 기증받았다며 관광지로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또 금마면 세연리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복한과 아버지 복위룡 선생의 묘가 있었다. 복위룡의 묘는 복익채 회장이 1992년 발견했다고 한다. 아들 복한의 묘소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었는데 당시 무속인들이 가리켜 준 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거기서 비석이 나왔다는 것이다. 1993년 10월 2일 그곳에 봉분을 만들어 홍주향토문화회에서 비석을 세웠다. 그 근처에는 복위룡을 추모할 수 있는 사당도 세웠다. 

금마면 송암리, 속칭 세연리 산 기슭에 있는 복한의 아버지 복위룡의 묘. 복익채 회장이 1992년 비석을 발견해 봉분을 복원했다.
금마면 송암리, 속칭 세연리 산 기슭에 있는 복한의 아버지 복위룡의 묘. 복익채 회장이 1992년 비석을 발견해 봉분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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