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열망 이어간 10·17의거… “숙제는 남았습니다”
5·18의 열망 이어간 10·17의거… “숙제는 남았습니다”
  • 노진호 기자
  • 승인 2020.05.18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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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이상진 선생 인터뷰
80년 10월 17일 고대서 광주학살 규탄 시위
경찰에 체포돼 고문·구타… “이러다 죽는구나”
벌써 40년… “그때의 진실 반드시 밝혀져야”
1980년 10·17 고대 의거로 5·18 민주유공자로 등록된 이상진 선생. 사진= 노진호 기자
1980년 10·17 고대 의거로 5·18 민주유공자로 등록된 이상진 선생. 사진= 노진호 기자

“저녁때쯤 경찰서로 연행됐는데 짬뽕을 시켜주더군요. 허겁지겁 먹고 있었는데 형사가 한 마디 하더라고요. ‘국물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순간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이상진 선생(당진 거주·64)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해 광주시민과 전라도민이 중심이 돼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12·12사태를 발생시킨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故 김대중 대통령 등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와 전라도 그리고 5월로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후에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계속 이어졌다. 이상진 선생 또한 민주화에 대한 불씨를 이어간 사람 중 하나였다.

이상진 선생이 경찰에 잡혀간 것은 1980년 ‘고려대학교 10·17의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광주에서 전대미문의 ‘학살’이 벌어진 1980년, 고려대는 9월 강제폐쇄가 풀렸다. 공포가 대학을 짓누르던 시기였지만, ‘그 일’을 알고 있던 학생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이에 이상진 선생(전기공학과 75학번)을 비롯한 박구진(경영 73학번)·도천수(철학 73학번)·최봉영(철학 73학번)·故 김관회(경제 74학번)·전성(정외 77학번)·박민서(사학 79학번) 등 7명으로 ‘준비팀’이 꾸려졌다.

이상진 선생은 “80년 당시 서울에서도 시위는 계속됐습니다. 또 저는 고향이 광주라 소식을 듣고 있었고요. 그 일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며 “구로공단 인근에 있던 내 자취방에 모여 이틀간 회의를 했습니다. 시위 방법을 논의하고 문안(격문)을 작성했죠. 거사일은 10월 17일로 정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준비팀이 쓴 격문의 제목은 ‘반파쇼민주화의 횃불을 높이들자!’였으며, 그들은 ‘광주학살 책임져라’라고 쓴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이상진 선생이 2017년 8월 발표한 자료집을 보고 10·17의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노진호 기자
이상진 선생이 2017년 8월 발표한 자료집을 보고 10·17의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노진호 기자

준비팀은 10월 17일 당일 가장 많은 수강생(200여명)이 모이는 문과대(시계탑 건물) 3-132강의실을 의거의 발화점으로 삼았다. 오전 10시 자연과학개론 강의가 시작됐고, 30여분쯤 지난 후 격문을 살포·낭독했다. “전두환군사파쇼일당은 유신체제가 낳은 사생아다. 전두환은 광주대학살의 총지휘자이고, 민족도살자이며 양민학살의 장본이다. 역사상 누가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는가?” - 당시 격문中 일부

이후 오전 11시경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나왔고 여러 학우들이 가세해 시위 대원은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약 1시간 동안 스크럼을 짜고 4·18기념탑을 지나 중앙도서관을 돌아 본관 앞뜰에서 집회를 벌였다. 이후 증강된 경찰은 삽시간에 그들을 포위했고, 시위대는 잡히는 족족 ‘닭장차’에 처박혔다.

고대 10·17의거로 준비팀 7명은 모두 체포됐고, 진압경찰의 카메라를 뺏으려던 학생 1명과 함께 총 8명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됐다.

이상진 선생은 “체포된 후 성북경찰서로 갔다. 물고문부터 당했다. 갖은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버틸 때까지 버텨봤는데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난 늦게 잡힌 편이라 고문 기간은 짧았다”면서도 “(경찰이)미리 그려놓은 틀에 맞춰 넣어야 해서 그런지 강도가 좀 심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당시의 ‘웃픈’ 일화도 하나 소개했다. 그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 친한 선배와 마주쳤다. 그런데 그 선배가 ‘너는 누구냐’라고 했다. 날 빼주려고 모른 척한 것이다. 나도 초면인 척했다”며 “결국 나중에는 들통이 나 둘이 엄청나게 맞았다. 괘씸죄에 걸린 모양이다”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사자는 ‘해프닝’처럼 이야기했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국혜지·전북대 80학번)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남편은 가끔 자다가 비명을 질렀다. 악에 바친 소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그 비명을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며 “영화 ‘1987’의 고문 장면을 본 남편이 ‘저건 그저 영화다. 실제로는 더 심하다’고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상진 선생의 이야기는 몇 달 전 일처럼 생생했지만, 40년 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올림픽도 월드컵도 열리지 않고 대통령도 국민이 직접 뽑지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착검(着劍)을 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군법회의 재판정까지 선 이상진 선생이지만, 민주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불과 3년 전인 2017년의 일이다.

이상진 선생은 “졸업 후 취직을 하고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민주화운동을 계속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 고향 광주 사람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오히려 죄책감도 들었다”며 “이런저런 이유로 유공자 신청을 미뤘고 우여곡절 끝에 인정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는 1980년의 민주화운동을 ‘광주’와 ‘5월’로만 보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어 “촛불혁명(2016년 10월~2017년 4월) 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며 “투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덧붙였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17년 7월 4일 1980년 10·17 의거 참여자 중 명예회복과 보상을 신청한 18명 가운데 마지막 신청자인 3명(이상진·박구진·최봉영)을 관련자로 인정했으며, 정부도 10·17의거가 5·18 민주화운동이었음을 공식 인정했다.

더불어 1993년 9월 13일 공개된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는 고려대 10·17의거에 대해 ‘5월 소요 이후 최대 규모의 학생 시위가 10월 17일 서울 고려대학에서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두환 대통령의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학생들의 굳은 결의를 나타내 주고 있다’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10·17의거 후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 날의 ‘준비팀’ 대원들은 이후 변호사, 정당인, 자영업자 등으로 각자의 삶을 이어갔다. 이상진 선생도 졸업 후 철강회사에 들어가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듯 보이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이상진 선생은 “5·18 당시 발포명령자, 헬기사격, 암매장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 40년 전 일을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실을 밝혀야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아직도 이른바 ‘보수진영’에서는 북에서 내려왔다느니 가짜 유공자가 있다느니 하는 망언을 한다. 또 전두환의 명패나 동상도 곳곳에 있다. 아직 할 일이 남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이상진 선생은 ‘미안하다, 죄스럽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더 많이 희생된 고향 광주 사람들에게,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후배들에게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한 요즘 젊은이들에게 말이다.

그는 “그래도 나 때는 취직 걱정은 크지 않았다. 비교적 빨리 사면·복권·복학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시대의 혜택을 본 사람인지도 모른다”며 “청년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돼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함께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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