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선 시인, 후덕하고 넉살 좋은 이야기꾼
신익선 시인, 후덕하고 넉살 좋은 이야기꾼
  • 허성수 기자
  • 승인 2020.08.27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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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21권 포함 30권 출간, 지금은 윤봉길에 관해 집필중
신익선 시인은 흰 수염의 후덕한 얼굴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신익선 시인은 흰 수염의 후덕한 얼굴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책을 내는 다작의 문인이지만 생계를 위해 건축업을 하고 있다.

평생 고향 예산을 지키며 살고 있는 신익선 시인, 그는 지금까지 시집 21권을 포함해 30권의 책을 저술했다. 지금도 그는 3권의 책을 쓰고 있다. 예산이 배출한 상해의거의 주인공 윤봉길 의사에 관한 책이다. 내년 2월 경 출간을 목표로 원고를 정리하고 있다. 이미 그는 2015년에 추사 김정희에 대해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예산문화원)라는 제목의 책 3권을 냈다. 또 지난해 12말에는 ‘예산에 잠든 조선 선비의 표상 면암 최익현’(예산문화원)을 출간했다. 
남들은 평생 책 1권 내기도 힘 드는데, 그의 왕성한 집필을 가능케 하는 사유의 샘은 가뭄을 탈 줄 모른다. 후덕한 얼굴에 하얀 수염이 잘 어울리는 사나이, 게다가 여유만만한 모습이 궁색한 시인 같지 않다. 그렇다고 그 책들이 모두 잘 팔돈을 번 것도 아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시집은 더욱 안 팔린다. 그래도 그는 부지런히 써서 책을 낸다. 정부의 공모사업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시를 쓰기도 하는데 이런 프로젝트는 출판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간혹 문인들의 생계에 도움이 된다. 시인으로만 살아갈 수 없어 생계수단이 따로 있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는 건축업을 한다. 집을 짓거나 수리를 전문으로 한단다.
“글만 써서는 돈이 안 나와 건축을 해. 집 하나 고치면 4000만원 남아요. 건물(업무용 빌딩)은 더 남고….”
그래서 그는 가난한 시인들을 만나면 밥과 커피를 잘 산다. 원래 그의 전공은 건축이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취미가 독서였다. 책이 너무 좋아서 수업시간에도 몰래 독서를 했다. 
“나는 무작정 책만 좋아했어. 초교시절에 삼국지를 읽었지. 중고교시절에도 공부는 않고 수업시간 책만 읽었지.”

그는 덕산초교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는 독서광이었다. 중고교시절에도 늘 수업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 버릇이 6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책 속에서 길을 찾았지만 예비고사에 떨어지는 등 대학 가는 길은 평탄하지 못했다. 그가 시를 만난 것은 고교시절이었다. 그것도 국어시간이 아니라 생물시간 선생님이 읽어주는 시 한편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의 독서열은 지금도 여전하다. 매일 주문한 책이 집으로 서너 권씩 배달된다. 마치 식탐가처럼 과식하듯 탐독하는데 다행히 배탈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지식과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또한 그만의 독창적인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배운다. 그래서 그는 시 뿐만 아니라 소설과 문학평론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창작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게다가 지역에서 배출된 역사인물들도 그가 발굴한 자료와 영감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다. 
“매헌윤봉길월진회 이태복 회장이 윤봉길 전기를 썼는데 나는 ‘당신 다 틀렸다’고 말했어요. 그걸 쓰려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윤 의사 어머니 김원상 여사가 14명의 자녀를 낳았어요. 그런데 거기는 7명을 낳았다고 써 있어. 윤봉길이 재산가로 나오기도 하는데 홍수가 나서 버려진 땅을 일궈 먹고 살았어. 아버지는 문맹이었고….”
너무 가난했던 윤봉길은 서울에 돈 벌러 가야만 했다고 한다. 
“윤봉길은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었어. 지금 윤봉길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윤봉길 이름 갖고 사는 사람이 보통 많은 게 아니야. 그런데 윤봉길을 몰라.”
그는 어릴 때부터 윤봉길의 유족들이 사는 이웃으로 살면서 많은 것을 듣고 수집한 자료로 역시 3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저서를 통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겠단다. 그가 향토 출신 인물에 대해 쓰는 책들은 산문의 형식으로 쓰는 평전이 아니다. 시인으로서 짧은 운문 형식을 띤 시문학서다. 말하자면, 시로 쓰는 평전이요,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상재를 한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가 그렇고, ‘면암 최익현’이 그런 형식으로 쓰였다. 
추사 김정희를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시인은 그가 쓴 국문 원고 전부를 영문으로도 번역해 3권의 저서 속에 모두 실었다. 즉, ‘추사여, 겨레의 혼불이여’는 한영대역판인 셈이다. 그는 윤봉길에 대한 집필이 끝나면 홍성이 배출한 민족시인 한용운에 대해 쓸 계획이다. 
그에게 시는 무엇일까? 
“시란? 시라는 것은 은유가 핵심이야. 그런데 은유가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시는 있잖아. 그 무엇으로도 수단이 돼선 안돼. 걱정이 돼서도 안돼. 시는 시 자체로 생명이지. 시도 시 나름대로 시에 생각을 입혀야 돼. 인위적인 것은 배제하고…. 시 예술세계는 축약과 무한한 압축이 필요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생기야.” 
그는 생기가 모든 예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문화예술의 핵심이 시라고 생각해. 심청전에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죽어. 그것을 비틀어서 연꽃의 반란이라고 하면, 이게 뭐지? 심청이 연꽃이 된 것이 아니고 연꽃이 심청을 불러들인 것이지. 시는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 보여주는 거야.” 
그는 탁월한 문학평론가로서 산문도 잘 쓴다. 동료 시인들이나 첫 시집을 내는 후배들을 위해 대가도 받지 않고 촌철살인의 시평을 써주곤 한다. 
“문학평론도 뭐냐 하면, 도그마(dogma)다. 아무도 못 보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 시는 공부하지 않으면 죽어도 못써. 공부만 해서 되나? 아녀. 부지런하고 땀 흘려 고민해야 돼. 영감을 어떻게 받아서 써? 일단 쓰고 나서 영감을 받는 것이지. 그래서 죽어라고 써야 한다.”
요즘 시인들이 홍수를 이룰 정도로 흔한 세상이지만 그의 말은 아무런 감흥도 기교도 없이 생명 없는 시를 쓰는 게으른 시인들을 질타하는 역설로 들렸다. 
“대학원 시절 은사 김재홍 교수님이 도그마에 대해 가르쳐 줬어. 누구 시든 어떤 글이든 평가할 때는 다른 사람이 잡아내지 못한 것이 있어야 돼. 그게 나를 끌고 여기까지 왔어.” 

지난해 7월 자암 김구기념사업회 출범식 때 신익선 시인.
지난해 7월 자암 김구기념사업회 출범식 때 신익선 시인.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시인이다. 

신익선 시인은 지난해 창립한 자암김구기념사업회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자암 김구는 예산 신암면 출신으로 조선시대 주자학자였다. 또한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추사와 맞먹는 명필가였다. 그러나 추사나 다른 인물만큼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자료도 부족해 그의 어깨가 무겁다. 광산김씨 문중과 예산군이 서둘러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지만 신 시인은 순서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자암이 누군지? 행적과 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서원도 복원해야 돼. 그러고 나서 기념사업회를 출범해야지.”
먼저 선행돼야 할 연구사업을 위해서는 학자들에게 용역을 맡길 수 있는 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젊은 학자들에게 돈만 주면 미친 듯이 연구한다. 200자 원고지 장당 1만5000원~2만원씩 원고료 주면 학자들이 왜 안 하겠어. 자암의 행적, 시문학, 사상 등을 먼저 연구해야 돼. 지금 자암에 대해 나온 책이 국내에 딱 한 권 있어. 그런데 구입해서 봤더니 그 책마저도 부정확해.”
무엇보다도 시인이 본업이라고 여기는 그는 지금 22권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시집은 ‘기침의 역사’를 준비하고 있어. 제목을 잡고 보니 코로나와 비슷해. 기침의 역사는 먼지니까.”
처음부터 넉살을 부리며 반말투로 하는 시인의 이야기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 마주앉은 우리 사이가 두어 시간 동안 이웃처럼 더욱 가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질 듯한 이야기를 기자가 적당히 눙을 쳐 마무리 짓고 일어났다. 곧 태풍이 온다는 예보에 따라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이 덕숭산 골짜기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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