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승 장로, 평생 교회ㆍ교육ㆍ사회사업 헌신
박우승 장로, 평생 교회ㆍ교육ㆍ사회사업 헌신
  • 허성수 기자
  • 승인 2020.09.15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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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한올중ㆍ고 명문교로 성장, 초원회 통해 이웃사랑 실천
박우승 장로는 예산농고 2학년 때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을 블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학교법인 한올학원 건물 앞 뜰에서.
박우승 장로는 예산농고 2학년 때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학교법인 한올학원 교정에서.

온양한올중ㆍ고등학교는 지난 60여 년간 박우승 장로의 피와 땀, 눈물이 반석이 되어 오늘날 충남지역 최고의 명문교로 성장했다. 

예산농고 시절 기독교 입문 야학 운영
박우승 장로가 일찍이 교육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ㆍ15 해방과 6ㆍ25 전쟁을 겪었던 어린 시절 학업을 할 수 없는 가난한 민중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에서 비롯됐다. 1934년 충남 예산군 대술면 농리(돈절리내 벙풍두리),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비교적 나은 형편에서 대술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사범학교와 예산농고를 다녔다. 

예산농고 2학년 때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곧 바로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그것은 그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의 주변에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시작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고 감동을 받은 데다 선택을 받은 자로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한 후에도 방학 때마다 농촌으로 내려가 야학을 하며 계몽운동을 했다. 

“제가 신학과를 선택한 것은 목회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사회사업가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박 장로의 말에 따르면, 미국 선교사가 세운 대학에서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기초 위에 참된 헌신과 봉사를 배우기 위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6ㆍ25 전쟁이 끝날 무렵 대학생 신분으로 그는 학교를 설립했다. 방학기간 시골에 내려와 야학을 잠깐 하다가 떠나는 것이 아쉬웠던 지역주민들이 그에게 아예 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1954년, 충남 부여에서 처음으로 인명중학교를 설립했으나 지역 유지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으로서 자신의 공부도 해야만 했던 그는 고학으로 학업을 겨우 마친 후 서울특별시 교육청 공무원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을 위한 삶에 안주하는 대신 원대한 포부를 갖고 인생의 3대 목표를 정했다. 첫째는 교회사업, 둘째는 교육사업, 셋째는 사회사업이었다. 

지금은 유물이 된 옛날 교명의 정문 앞에서 설명하는 박우승 장로.
지금은 유물이 된 옛날 '온양여종고' 교명의 정문 앞에서 설명하는 박우승 장로.

1964년 여전히 대한민국은 전쟁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수많은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봉사단체로 초원회를 만들었다. 하루 10원씩 절약해서 모은 성금으로 목돈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을 돕기로 한 것이다. 빈민운동을 하고 있는 동지들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1966년 1월 1일부터 모금을 개시했다. 초원회보도 발간하여 홍보도 하고 재정도 투명하게 공개했다. 1974년부터 서울 종로에서 구두닦이 소년들을 도우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지금의 한올중ㆍ고를 맡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부터였다. 온양에서 한 사학법인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 재단에서는 1956년 삼화중학교를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2년 앞서 1954년 대학생 시절 설립한 학교법인 새한학원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 이웃을 사랑, 스스로를 사랑’을 교훈으로 정해 기독교 학교로 새 출발했다. 동시에 삼화여자상업고등학교도 병설했다. 삼화여상은 1985년 8월 31일 보통과를 설립해 삼화종합고등학교로 운영하다가, 2001년 온양한올고등학교로 교명 변경과 함께 인문계고로 전환시켰다. 2000년말 학교법인 이름을 한올학원으로 변경하면서 삼화여중도 함께 온양한올중학교로 새롭게 출발했다. 

한국기독교평신도세계협의회 총재
고교시절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26세의 매우 이른 나이에 장로가 됐다. 1960년 장로로 임직을 받은 그 해 샛별교회(신성교회) 개척을 필두로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로서 평생 많은 일을 했다. 인생의 3대 목표로 교회사업을 첫 번째로 꼽았던 그는 항상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고, 그 다음이 이웃사랑을 위한 교육과 사회사업이었다. 

한올학원 개교60주년 기념탑 앞에 선 박우승 장로. 대학생 시절이었던 1954년 부여에서 지역주민들의 요청으로 설립했던 중학교가 지금은 중학교 24학급, 고등학교 33학급의 양적 성장과 함께 최고의 시설을 갖춘 명문교가 됐다. 

△1964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동부연회 대표 △1968년 감리교 청장년전국연합회 회장 △1970년 기감 유지재단 관리위원장 △1969년 감리교본부 총리원 이사 △1982년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1989년 기감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 △1999년 기감 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 감리교평신도단체협의회 회장, 감리교계통학교협의회 회장 △2007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학교연맹 부이사장 △2015년 한국기독교원로장로회 총연합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한국기독교평신도세계협의회 총재로 활동하고 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1천만 명의 한인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남북통일과 복음화를 위해 결성된 단체가 한국기독교평신도세계협의회죠.” 

박 장로는 감리교 교단을 대표하는 평신도 지도자로서 30~40대부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감리교 대표로 참석한 적도 있고, 한국기독교협의회(KNCC) 감리교 대표, YMCA서울 이사장, 전국YMCA 이사장 등 개신교 초교파 연합운동에도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언론계에도 직접ㆍ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기독교방송(CBS) 이사를 비롯해 감리교 장로신문을 창간해 발행인으로 직접 운영하기도 했으며, 1969년 화보잡지로 ‘크리스챤라이프’의 경영에 참여했다. 1970년에는 한국기독교시청각이사회 이사장을 맡아 기독교TV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편, 초원회의 취지에 공감하고 모금에 참여하는 회원 수가 점점 늘어났다. 당시 학교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학생들에게 옥수수 가루를 급식했는데 당장 먹을 수 없는 데다 집에 싸가져 가다가 부주의로 쏟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제가 서울시교육청에 다니던 1960년대는 옥수수 가루를 학생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집에 가져가 죽을 쒀 먹으라는 것인데 저는 ‘480구호법’을 바꿔 빵으로 만들어 급식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밀가루를 40% 섞은 빵으로 만들어서 급식하게 되었죠.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의 학교가 다 빵으로 바꿔 급식을 하게 됐어요.”

박 장로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미공법(U.S. Public Law)480호’ 구호법을 바꾼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편리하게 완성된 빵의 형태로 급식제도를 개혁한 장본인 앞에서 새삼스럽게 옛날 생각이 났다. 기자도 1960년대 경상도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옥수수 가루로 배급을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은 보자기로 잘못 싸 그 자리에서 가루를 다 쏟아버렸다. 그래서 빈손으로 쓸쓸하게 귀가해야만 했다. 그 후 언제부턴가 20~30개의 빵을 한 판으로 쪄서 한 개씩 떼어 나눠주기 시작했다. 빵의 윗부분이 갈색으로 두껍게 굽혔지만 그래도 맛있게 씹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박우승 장로는 온양한올고등학교 교장으로도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박우승 장로는 온양한올고등학교 교장으로도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초원회는 서울YMCA의 도움을 받아 교육강좌를 실시하고 1975년부터는 회원 확대운동을 전개했으며, 1987년에는 마포에 초원의 집을 개관했다. 1994년 온양에 한올중ㆍ고의 도움을 받아 온양초원회(지부)를 창립하고 서울 본회에 재단법인 초원장학회를 설립했다. 갈수록 가입하는 회원이 전국단위에서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로 영역을 넓히며 늘어났다. 

2008년 온양에서 온양한올중ㆍ고등학교의 도움을 받아 성폭력예방을 위해 주민들과 지역봉사단체들이 야간순찰 일일봉사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부터는 1인당 월 1만원의 모금운동을 실시하고 있는데, 실직자 중에서 야간순찰 요원을 채용해 월 20만원씩 수당으로 지급한다. 초원회는 이런 방식으로 전국에 20명 단위로 실직자 돕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초창기 초원회의 창립을 주도했던 박 장로는 2014년에 회장으로 추대됐다. 60년대 가난했던 시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바로 이 시편 23편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시켰던 ‘초원회’는 지금도 한결같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꾸준히 월보를 발행해 회원들에게 보고해야 될 정도로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로 나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팔순에 늦깎이로 문단 데뷔 
초원회보를 매달 편집하면서 꾸준히 글을 쓰는 동안 그는 ‘글쟁이’가 되어버렸다. 2017년 뒤늦게 국제문학을 통해 시와 수필을 추천받고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 2019년에는 처녀시집 ‘먼 하늘을 바라보며’를 출간했다. 또 2020년 5월에는 제23회 장로문학상을 수상했다. 개신교 장로 직분을 가진 문인들로 조직된 장로문학회는 회원들 가운데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을 선정해 매년 수여하는 문학상으로 상당히 권위가 있다. 

박 장로는 요즘도 매일 법인 사무실을 지키면서 글을 쓰는 일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시와 수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그는 소설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어린 시절 형편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도 꿈을 심어주며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올해 86세,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열정적인 문학청년의 모습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지만 오히려 창작에 집중할 수 있어서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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