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찾아 30년… “조상들의 메시지, 알려야 했다”
전설 찾아 30년… “조상들의 메시지, 알려야 했다”
  • 황동환 기자
  • 승인 2021.01.11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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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정헌 내포구비문학연구소 소장
1987년 동화작가 등단… “대학원 과제 계기로 전설 수집”
40년 교직생활… “옛날이야기, 단지 허구 아닌 교훈·지혜”
신문 기고·출판 쉼 없이… “지난해 김좌진 장군, 올해는 샘”
내포구비문학연구소 김정헌 소장. 2017년 구항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40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한 김 소장은 현재 홍성을 포함한 내포지역 일대에 산재해 있는 전설들을 조사해 대중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황동환 기자
내포구비문학연구소 김정헌 소장. 2017년 구항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40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한 김 소장은 내포지역 전설들을 조사해 알리고 있다. 사진= 황동환 기자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불분명한데다 작자 미상이고, 많은 부분 꾸며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그 ‘이야기(legend)’ 속에 빠져들곤 했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을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절묘한 반전의 요소들이 이야기 곳곳에 배치돼 있다. 이처럼 묘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이 ‘옛날이야기’다.

▲가난한 선비와 암행어사 ▲가야산 호랑이를 만났던 두 아낙네 ▲삼대 효자의 넋이 변한 바위 ▲매미가 된 부인과 서낭당고개 등 홍성의 마을마다 그 기원과 작자가 모호한 ‘옛날이야기’가 하나쯤 혹은 그 이상 존재한다.

옛날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오랜 경험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너무 쉽게 대했다. 하지만 결코 간단하게만 볼 일이 아니다. 이야기될만하니까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것이고, 전할 만하니까 살아남은 것이다.

전설, 신화, 민담 등의 형식을 빌려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의 가치를 깨닫고 홍성지역 마을들을 직접 답사하며 묻혀있던 그 이야기들을 30년 이상 수집해온 동화작가가 있다. 내포구비문학연구소 김정헌 소장(67)이 그 주인공이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던 마을의 수많은 사연이 그의 노력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가령 아기들한테 쓴 약 잘 못 먹이잖아요. 그런데 껍데기에 달콤한 것 묻혀서 주면 잘 먹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사실만 이야기하면 무미건조하고 딱딱해질 텐데 재미있는 이야기로 포장해 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김 소장의 말처럼 삶의 지혜와 진실을 담기엔 민담·전설·신화 등과 같은 그릇이 딱 이다. ‘달콤한’ 재미가 가미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머리 좋은 이야기꾼이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구성이 아주 탄탄해요. 단지 허구로만 볼게 아니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합니다. 물론 재미도 있지만 그 이야기에 담겨 있는 조상들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이 잘 깨달을 필요가 있죠.”

김 소장은 1987년 ‘아동문예’를 통해 등단한 동화작가다. 이후 그는 홍성군과 인근 지역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설 수집 활동을 병행했다. 그리고 김 소장은 본인의 문학적 재능을 동원해 묻혀있는 전설들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가 수집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지역신문에 게재됐고, 이렇게 정리된 자료들을 다시 책으로 묶어내면서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던 수많은 옛날이야기들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김 소장은 공주교대 졸업 후 1978년 은하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로 시작해 2017년 구항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에서 6개월 빠지는 기간 교직에 몸담았다. 김 소장은 교단을 떠난 직후 내포구비문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옛날이야기를 수집·정리해 알리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제가 동화작가로 등단할 즈음, 나만의 색깔이 있는 글을 써야겠다는 의욕이 강했어요. 우리 지역의 여러 가지 옛날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 이야기들을 현대동화 속에 접목시켜보는 작업, 내 작품 속에 녹여봐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던 중 운명처럼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최운식 교수의 구비문학 강의를 들은 것이 현재 김 소장으로 하여금 옛날이야기에 천착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신화, 전설, 민담 이걸 설화라고 하잖아요. 이 세 가지가 구비문학의 중심이죠. 그런데 최 교수님이 자기 고장의 ‘설화체’를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주신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 홍성의 설화들을 채록해 연구하기 시작했죠. 평소에 옛날이야기를 동화 속에 접목시켜보겠다는 제 꿈과 맞아 떨어진 겁니다. 그게 시작이죠. 그런데 동네마다 이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알고 계신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그 이야기가 딱 끊기는 거예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이걸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김 소장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알려야한다’고 판단했다. 이 때부터 김 소장은 본인이 조사해 정리한 자료들을 지역신문에 기고했다.

“홍성신문의 전신이 ‘주간홍성’인데 창간된 지 몇 년 안 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격주로 게재하고 있어요. 당시 담당 기자를 만나 취지를 이야기했더니 좋다고 해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김정헌 소장은 채록 등의 방식으로 수집한 마을의 전설들을 지역신문에 정리해 발표하고, 이후 모은 자료들을 묶어 책으로 발간했다. 사진=황동환 기자
김정헌 소장은 채록 등의 방식으로 수집한 마을의 전설들을 지역신문에 정리해 발표하고, 그 자료들을 묶어 책으로 발간했다. 사진= 황동환 기자

김 소장은 최근 3개월 사이 세 권의 책을 펴냈다. 그 중 한 권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청산리대첩 100주년 기념해 출간한 장편소설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이다.

“김좌진 장군이 호명학교를 세웠다고 하잖아요. 호명학교가 갈산초등학교로 이어지거든요. 훌륭한 독립군 총사령관이 세운 학교가 대한민국에 여기 말고 또 있나? 이런 걸 생각하면 참 대단한 학교잖아요. 제가 갈산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였어요. 갈산지역 민담, 전설 등을 수집하던 중 지역 어르신들에게 ‘어려서부터 힘이 남달랐다든지…’ 등의 김좌진 장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우리 지역 위인이니까 과장된 내용이 있긴 하겠지만 재밌는 이야기가 많았죠. 그래서 김좌진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책은 10년 가까이 구술 채록한 관련 자료 바탕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김 소장은 ‘내포옛터이야기(4집)’과 ‘홍성의 나무와 숲 이야기’도 연달아 출간했다. 지난해 12월에 발간한 ‘내포옛터이야기’는 2017년 (사)한국문인협회 홍성군지부(대표 황정옥)가 기획한 내포구비문학총서 중 네 번째 책이다.

“내포옛터이야기는 4집으로 마무리하려고 해요. 이젠 과부하도 걸리고 소재도 거의 다 소진됐어요. 찾아다니는 일이 예전만 못합니다. 내포지역 설화는 앞으로 몇 년간 더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5집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나무이야기는 대부분 이전에 발표했던 것을 정리해서 묶은 책입니다. 올해는 동네마다 생명수 역할을 했던 ‘샘’을 주제로 책을 써보려고 해요. 어떤 동네는 샘 주위에 정자도 세워놓고 잘 관리하는 마을도 있는데, 길 넓힌다고 없애면서 사라지는 샘이 너무 안타깝죠.”

김 소장이 옛날이야기들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발굴해 낸 인물들이 있다. 춘향전과 판박이인 함흥기생 만향이 그렇다.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김 소장의 글을 읽은 홍성군의 한 주민이 “만향의 후손인데 우리 동네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며 제공해준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발굴한 것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스승인 조선시대 방랑 시인 손곡 이달의 경우 출신 지역인 홍성군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을 김 소장이 발굴해 널리 알리기도 했다.

“원래 제 전공이 동화잖아요. 창작동화집도 꾸준히 발표해왔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써야할 것이고, 우리 지역에 묻혀있는 인물들을 발굴하는 작업도 하려고 해요. 한국 근대무용이 한성준에서 비롯됐다는 것과 중고제 판소리가 최선달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도 그 분들의 일대기는 잘 모르잖아요. 그 일대기를 써 보고 싶어요.”

고희를 몇 년 앞둔 나이지만 김 소장의 창작열은 식지 않았다. 조사 범위도 홍성지역에서 더 넓은 지역으로 범위를 확대해갈 계획이다.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이어가는 힘과 열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1990년 첫 창작동화집 ‘할머니와 누렁이’를 발표했죠. 그 책이 나왔을 때 각 학교 선배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많이 소개해줬어요. 그 때 제게 힘을 줬던 동료와 선배 선생님들 중 많은 분이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 내 글에 관심을 가져준 수많은 독자들, 내 작업의 가치를 알아본 군청 공무원과 홍성문화원 등이 있어 지금까지 작가로서 활동했던 것 같아요. 그분들에게 실망을 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영화제를 석권하고, K-POP이 빌보드 1위를 넘어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는 시대다. 우리나라가 이처럼 문화강국의 면모를 보이게 된 이유 중에는 할머니나 이웃 아저씨에게 들으며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었던 ‘옛날이야기’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옛날이야기’는 그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진실한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농축된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현재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옛날이야기’에 더 귀기울여보자. ‘옛날이야기’라는 다리 위에서 조상들의 가르침과 마주할 것이다.

지금도 김 소장은 우리와 조상들을 이어주는 교량을 지켜내려 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더 없이 소중한 이유다.

김정헌 소장은 1987년에 ‘아동문예’를 통해 등단한 동화작가다. 그는 직접 수집한 전설을 본인의 동화 작품과 접목시켜볼 생각으로 시작한 ‘옛날이야기’ 조사를 30년 넘게 이어가고 있다. 김 소장이 지난해 12월에 펴낸 '내포옛터이야기' 4집을 손에 들고 있다. 사진=황동환 기자
김정헌 소장은 1987년에 ‘아동문예’를 통해 등단한 동화작가다. 그는 직접 수집한 전설을 본인의 동화 작품과 접목시켜볼 생각으로 ‘옛날이야기’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김 소장이 지난해 12월 펴낸 ‘내포옛터이야기’ 4집을 손에 들고 있다. 사진= 황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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