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처럼, 이번에도…
그때처럼, 이번에도…
  • 노진호
  • 승인 2021.02.0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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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포의 선택] 유류피해극복기념관
2007년 12월 7일 ‘사고’… 피해면적, 여의도 120배
2017년 9월 15일 개관… 전시·체험존·전망대 등 구성
자원봉사자 123만 2322명… 유네스코 등재도 추진
만리포 해변에 있는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세계적인 자원봉사자 성지’다. 우리의 바다를 살린, 그때의 아름다운 모습들.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제공
만리포 해변에 있는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세계적인 자원봉사자 성지’다. 사진은 우리의 바다를 살린, 그때의 아름다운 모습들.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제공

코로나19가 대한민국을 습격한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일진(一陣)’이 된 코로나19는 경제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으며,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았다.

대한민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8만 131명이며, 이 중 1459명이 사망했다. 충남의 확진자는 2087명이며, 사망자는 33명이다. 도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가장 많은 곳은 805명(사망 7명)이 감염된 천안이며, 홍성은 64명(사망 1명), 예산은 16명(사망 0)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이상 5일 0시 기준).

전 세계의 코로나19 확진자는 1억 390만 9961명에 달하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도 225만 8813명이나 됐다(이상 5일 오전 9시 기준).

조만간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이 힘겨운 싸움의 마침표를 언제 찍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만 쉴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우리는 이 위기도 보기 좋게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겪어내고, 일제강점기를 버텨냈으며, 6·25전쟁 후 보란 듯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듯 말이다.

우리의 ‘가슴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서해안 유류유출사고’이다. 가슴이 아픈 것은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고, 자랑스러운 것은 그 극복 과정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내포뉴스는 신축년(辛丑年) 새해를 맞아 만리포 해변에 있는 유류피해극복기념관(태안군 소원면 천리포 1길 120)을 찾았다. 이곳의 이야기가 코로나19의 늪에 빠진 우리들에게 ‘충분히 희망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는 윤성희 학예연구사와 유성상 해설가가 도와줬다.

 

14년 전, 그날…

악몽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건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6분경이었다. 충남 태안군 만리포해수욕장 북서방 5마일(8.04㎞) 해상에서 예인선 2척(삼성T-5호·삼호T-3호)이 해상크레인 부선 삼성 1호를 병렬 연결해 항해 중 좌측 예인줄이 절단, 크레인 부선이 밀리면서 대산항 입항 대기 중이었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충돌한 것이다.

충돌 후 허베이 스피리트호에서 흘러나온 기름은 순식간에 바다를 뒤덮었다. 이 기름은 사고 3일 만(12월 10일)에 태안 남면 앞바다(약70㎞)까지 쇄도했으며, 12월 17일에는 타르상태의 기름덩어리가 전북 군산 앞바다까지 퍼졌다. 또 이듬 해 1월 6일에는 사고 지점에서 90리가 넘게 떨어진 제주 조천읍 해안까지 기름이 유입됐다. 기름은 제주 앞바다까지 가는 동안 충남 5개 시·군 59개 도서 해안과 전라 6개 시·군 42개 도서 해안을 더럽혔다.

피해는 끔찍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유출된 원유는 1만 900t(1만 2547㎘), 오염지역은 해안선 375㎞, 오염도서 101개소, 총 피해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20배인 3만 4703.5㏊에 달했다.

유성상 해설사는 “그날의 검은 파도가 생생하다. 뻘과 모래톱까지 기름범벅이었다”고 회상했다.

충남의 피해는 더 끔찍했다. 피해면적 중 72.3%에 달하는 충남은 97%에 달하는 어업이 피해를 입었는데 보령과 태안의 피해 어가는 3만 6927곳이나 됐다. 원유 유출로 바닷물의 용존 산소량이 줄면서 인근 양식장의 어패류가 대량 폐사했다. 또 어장이 황폐해지면서 지역경제도 무너졌다. 당시 전문가들은 해양 생태계가 원상복귀 되려면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했다.

특히 당시 태안군 인구 6만 5000여명 중 75%가 어업에 종사했고, 그 중 맨손어민은 등록된 수만 1만이 넘었다. 이들은 자고 일어나니 먹고 살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유 해설사는 “태안의 염전과 양식장, 치어는 초토화 됐다. 몇몇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며 “타 지역에서 잡아오거나 사와도 팔리질 않았다. 그땐 답이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취재를 도와준 윤성희 학예연구사(왼쪽)와 유성상 해설사가 기념관 로비에 앉아 있다. 사진= 노진호 기자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취재를 도와준 윤성희 학예연구사(왼쪽)와 유성상 해설사가 기념관 로비에 앉아 있다. 사진= 노진호 기자

 

그 사람들 그리고 이곳…

절망만이 가득했던 바다와 그곳의 사람들을 살린 것 우리네 ‘정(情)’이었다. 그저 ‘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위대한 일이지만, 그런 마음이 그 사람들을 이끈 것이 아닐까. 당시 유류유출사고 복구를 위해 투입된 방제인력은 207만이었고, 자원봉사자는 123만 2322명으로 기록됐다. 물론 기록을 남기지 않은 자원봉사자까지 합하면 그 수가 얼마나 더 늘지는 모른다.

사고 10년 후인 2017년 9월 15일 문을 연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그들을 위한 공간이다. 윤성희 학예연구사는 “검게 변했던 바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회복됐다”며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기념관도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총 사업비 115억 6500만원이 투입된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1층 전시존 ▲2층 체험존 ▲3층(옥탑층) 전망대로 구성됐다. 건물은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벽면은 깨끗함을 상징하는 하얀색으로 칠해졌다.

‘세계적인 자원봉사자 성지’인 이곳 로비에 들어서면 당시 상황을 새겨놓은 벽면 부조가 보인다. 유 해설사는 로비 바닥 동판을 가리키며 “당시 20개국 1000여명이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다. 따로 초청을 한 것도 아니었다. 스페인 등의 전문가는 자비로 오기도 했다”며 “동남아 출신 봉사자가 많은데 그것은 서해안과 가까운 경기 화성과 평택 등의 산단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층 전시존 입구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터치스크린이 있다. 자원봉사자 이름을 검색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더불어 1층 전시존 벽면에는 자원사자 50만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층 전시존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다의 악몽 ▲검은 쓰나미 ▲기적의 피워내다 ▲우리가 지켜야 할 바다 ▲우리가 지킨 바다 ▲바다와 인류의 공존 등으로 이뤄졌다.

유 해설사는 “복구 작업을 하다 보니 중장비가 못 들어가는 곳이 있었다. 우린 인간 띠를 만들어 물에 뜬 기름덩어리를 바가지로 퍼 옆으로, 옆으로, 뭍으로 옮겼다”며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해낸 것이다. 당시 그 광경을 본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바다를 퍼 나르고 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했다. 사고 4일 만에 자원봉사자 1만, 한 달 만에 방제인력 100만, 77일 만에 순수 자원봉사자 100만을 찍었다. 하늘도 감복한 것일까. 사고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2008년 6월 27일 만리포해수욕장은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우린 이미 ‘태안의 기적’, ‘서해안의 해피엔딩’을 알고 있지만 그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다. 유 해설사는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당시 정부는 하루 4000명의 지역민을 5개월 간 방제인력으로 썼다. 남자는 7만원, 여자는 6만원의 수당을 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했다”며 “아이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도 컸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나도 당시 임시아동센터를 운영했다. 전국의 또래 친구들이 응원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말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유 해설사는 자원봉사자들을 상징하는 밀랍인형 앞에 멈춰섰다. 그는 “당시엔 자원봉사 매뉴얼이 부족했다. 노약자나 임산부는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 문제점을 깨닫고 개선했다. 세월이 흘러 복지학에 ‘자원봉사자론’이 등장한 것도 봤다”고 말했다.

윤 학예사는 “문제 수습과정을 따져보고 개선해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대한민국의 강점”이라며 “지금도 생태계 회복이 완료됐는지 지속적으로 검사하고 있다”고 보탰다.

이어 윤 학예사는 지역주민들이 큰절을 하는 사진을 가리키며 “당시 주민들이 전한 메시지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였다”고 설명했다.

또 유 해설사는 어머니들의 사진을 보며 “남편과 아들을 바다에서 잃은 분들이 방제에 적극 나섰다. 그 분들에게 바다는 남편이고 아들이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당시 봉사에 참여했던 군인과 학생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환경교육의 현장인 셈”이라고 더했다.

2층은 ▲오션 스크린 ▲해양생물 되살리기 ▲타르볼 제거하기 ▲기름 제거하기 등으로 구성된 체험존이다. 이곳에서는 방제를 게임처럼 체험할 수 있으며,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이 즐기기에 적당하다고 한다.

유 해설사는 “여기선 나만의 물고기를 그려 오션 스크린에 띄울 수 있다. 내 물고기가 사는 곳이니 바다가 더 소중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3층은 되살아난 바다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유 해설사는 “1~2층에서 끔찍했던 사고와 힘겨웠던 복구 과정을 본 후 이곳에 와 깨끗한 바다를 보면 감동이 두 배, 세 배가 될 것”이라며 “꼭 이곳까지 들러 만리포의 아름다움을 담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내일…

지금까지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을 찾은 사람은 18만 3000명으로, 일평균 153명, 월평균 4592명에 달하는 수치다(2020년 12월 31일 기준). 이미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이미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충남도는 지난해 12월 7일 예산 스플라스 리솜에서 ‘태안 유류피해 극복 과정 공유 국제 콘퍼런스’를 열고 20만여건에 이르는 유류피해극복 공공·민간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논의했다. 특히 이 기록에는 123만여명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규모 자원봉사자 참여 내용도 포함돼 있어 그 의미가 더 크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올해 큰 변화도 있었다. 1월 1일자로 운영관리 주체가 충남도에서 태안군으로 바뀐 것이다. 태안군은 지난해 12월 11일 관련 조례 정비를 마쳤다. 군은 해양환경이나 재난안전 관련 교육 및 학술활동을 적극 유치할 방침이다.

또 이곳에서는 올해 연4회 유류피해극복의 달 행사(5월 사생대회/7월 영화축제/10월 국화 전시/12월 워크숍)을 펼칠 예정이며, 오는 9월 특별기획전시도 개최할 계획이다.

윤성희 학예사는 “세계에 유류사고가 난 곳은 많지만, 기념관은 이곳뿐”이라며 “지난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주춤했지만, 해외 전문가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의 해설사들은 대부분 사고 당시 복구에 참여했던 분들이라 정말 생생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며 “이곳이 그저 아픔을 되새기는 곳이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유성상 해설사는 “대한민국은 3면이 바다”라며 “바다가 살아야 우리도 산다는 잊지 말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람했다.

충남도청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면 닿는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의 관람시간은 3~10월은 오전 9시~오후 6시,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는 오전 9시~오후 5시이며, 휴관일은 1월 1일과 설·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이다. 관람료는 무료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사고 10년 후인 2017년 9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사진은 기념관 전경과 내부 모습들.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제공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사고 10년 후인 2017년 9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사진은 기념관 전경과 내부 모습들. 유류피해극복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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