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남을 준비하는… ‘동면’
다시 깨어남을 준비하는… ‘동면’
  • 노진호
  • 승인 2021.02.1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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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학관 정세훈 이사장 아홉 번째 시집 출간

정세훈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동면’이 출간됐다.

시집 ‘동면’은 ‘본질’, ‘엄동설한 폭설을 배경으로’, ‘저물녘’, ‘불면의 노동’ 등 50편의 시가 총 4부로 구성됐다(도서출판 b/1만원).

정세훈 시인은 책머리 시인의 말을 통해 “인간의 삶의 본질이 최우선시 돼야 할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자본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며 “우리의 문학은 산업화와 자본으로부터 점령당한 인간의 삶의 본질을 찾아 제자리로 복귀시켜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졸시 작업을 통해 우리 삶의 본질을 인간에만 국한하지 않고 자연과 생물, 무생물 등 우주 종교적 차원에서 찾고자 한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고 전했다.

시인의 말처럼 이 책 ‘동면’은 노동자적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과 풍경을 포착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시집 제목으로 내세운 ‘동면’이란 겨울이 지난 후 봄에서 가을까지 이어질 새로운 삶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겨울 동안의 긴 잠이다. 그래서 동면의 시간 속에는 깨어난 이후 활동해나갈 삶이 잠재돼 있다. ‘동면’이라는 시집의 제목은 이 시집이 잠재성의 시간을 전면화해 의미화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다음은 시 ‘동면’의 전문이다.

전철역엔 함박눈 대신 스산한 겨울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출근길을 적시었던/ 때아닌 겨울비가/ 깊은 밤 뒤늦은 귀갓길 광장에/ 번들번들 스며들고 있다

가까스로 빗방울을 털어낸/ 고단한 발길들/ 승산 없는 생의 승부수를 걸어놓고/ 총총히 빠져나간 불빛 흐린 전철역사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듯/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얼어붙은 노숙자의 잠자리를/ 실금실금 파고들고

정해진 궤도를 따라 달려온/ 마지막 전동차/ 비 젖은 머리통을 숨 가쁘게 들이밀고/ 들어온 야심한 밤

생이 무언지 제대로 젖어보지 못한/ 우리들의 겨울날은/ 때아닌 겨울비와 통정을 하며/ 또다시 하룻밤 동면에 들어가고 있다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이 책 해설을 통해 “동면의 시간 속에는 깨어난 이후 활동해나갈 삶이 잠재돼 있다. ‘동면’이라는 시집 이름은 이 시집이 잠재성의 문제를 핵심 내용으로 삼고자 했음을 짐작케 한다”며 “표제작에서 ‘동면’은 중의적인 의미로 우리 장삼이사들의 하루하루의 잠과 봄날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겨울잠을 모두 담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또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이 산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면서 어떤 악조건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열매를 맺으며 숲을 이룬다는 것은 사막과 같은 세상을 전복할 세계 내부의 잠재성이 땅 위로 현실화 되는 과정”이라며 “그것은 또한 세계의 ‘본질’이 실현되는 과정인 것”이라고 평했다.

한편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정세훈 시인은 중학교 졸업 후 소규모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이 됐다.

그는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몸의 중심’ 등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포엠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향기’,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 그림책동화 ‘훈이와 아기제비들’ 등을 펴냈으며,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과 제1회 충청남도 올해의 예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정세훈 시인은 지난해 8월 15일 홍성군 광천읍에 국내 최초 노동문학관을 열었으며,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사)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터 충남지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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