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그날… 역사 속으로 한 발, 한 발
역사적인 그날… 역사 속으로 한 발, 한 발
  • 노진호 기자
  • 승인 2021.04.23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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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충의사·기념관·저한당 등 예산 유적지 가보니…
상해 의거라는 역사적 그날을 앞두고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답사했다. 사진은 저한당으로 가는 돌담 위 이정표. 사진=노진호 기자
상해 의거라는 역사적 그날을 앞두고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답사했다. 사진은 저한당으로 가는 돌담 위 이정표. 사진=노진호 기자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40분,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에서는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일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에 윤봉길 의사가 수통폭탄을 투척한 순간이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을지 모른다. 특히 윤 의사의 상해 의거는 임시정부가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물에 빠진 갓난아이(임시정부)를 번쩍 들어 구한 사람이 윤봉길 의사”라고 말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고, 그 역사적인 날도 다시 마주하게 됐다. 내포뉴스는 ‘그날’을 앞두고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답사했다.

윤봉길 의사 영전이 봉안된 충의사. 사진=노진호 기자
윤봉길 의사 영전이 봉안된 충의사. 사진=노진호 기자

주차장에 내리면 충의사(忠義祠)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꽤 높아보일지 모르나 74개의 계단만 오르면 ‘영웅’을 만날 수 있다. 본전에 봉안된 윤 의사 영전을 참배하고 나니 전국의 어린이들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을 남긴 방명록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내포신도시부터 당진, 아산, 시흥, 장항 등 참 다양한 곳에서 찾았지만, 돌아갈 때는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충의사에서 내려와 윤 의사의 아내인 배용순 여사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로 향하는 24개의 계단을 오르면 푸른 소나무 그늘과 시원한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배용순 여사에게 안부를 전한 후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았다. 유물 56점이 전시된 기념관은 1908년 6월21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출생부터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까지 이어지는 연보로 시작된다.

등잔대와 명심보감 초본 등 출생과 어린 시절 관련 유물을 봤다면 윤 의사가 농민운동에 전념하게 된 공동묘지 묘표 사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또 월진회기와 부흥원 대들보 등도 눈에 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떠나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의 굳은 의지를 되새기면 망명과 수감호송, 유해송환의 경로(님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또 김구 선생과의 만남도 전하고 있는데, 광복 후 백범은 부산까지 윤 의사의 유해를 마중 가 무릎을 꿇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상해 의거 현장을 재현해놓은 부스에는 도시락과 수통폭탄, ‘그 유명한’ 회중시계 등이 전시돼 있다. 그곳을 나오면 형틀대와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재의 친필서한 등이 있다.

특별기획전을 통해 전시 중인 정정화 선생 관련 사진. 사진=노진호 기자
특별기획전을 통해 전시 중인 정정화 선생 관련 사진. 사진=노진호 기자

오는 30일까지 기념관에서는 특별기획전 ‘내포지역의 항일운동을 기억하다’도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여겨 볼 것은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정정화에 대한 기록이다. 스물하나 꽃다운 나이에 상해로 간 정정화는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받고 여섯 차례나 국경을 넘나들었다. 그는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후세에 전했다.

기념관을 나와 매헌윤봉길의사 어록탑을 지나면 등나무 그늘이 있다. 여기서 잠시 재충전하고 횡단보도를 건거 돌담 옆 태극기를 따라 걷다보면 ‘만유문(萬有門)’이란 현판을 볼 수 있다. 이 문을 들어서 윤 의사의 동상과 상해 의거 기념탑 등을 지나면 윤 의사가 네 살부터 중국 망명 이전까지 살던 저한당(抯韓堂)이 있다. 일제는 이 집에 ‘가장 악행을 저지른 집’이라고 써붙이기도 했다. 백범은 해방 후 두 번이나 이곳에 와 묵었고, ‘가슴 먹먹한 사연이 담긴’ 시계도 이곳에서 윤 의사 아버지에게 건넸다.

저한당을 나서면 태극기가 호위하는 도중도교를 만난다. 도중도(島中島)에는 윤 의사가 태어나 저한당으로 옮기기 전까지 살던 광현당(光顯堂)과 야학을 가르쳤던 부흥원(復興院)이 있다.

‘한반도 속 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면 ‘역사적 답사’가 끝난 것이다. 내포뉴스의 이번 답사는 윤 의사가 의거를 앞두고 김구 선생에게 했다는 말로 마무리하겠다.

“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안온하여집니다. 준비하십시오.”

도중도에 자리한 광현당. 사진=노진호 기자
도중도에 자리한 광현당. 사진=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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