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MZ세대’ 전성기의 호모 아르텍스
[칼럼] ‘MZ세대’ 전성기의 호모 아르텍스
  • 노진호 기자
  • 승인 2022.01.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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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사)한국음악협회 예산군지부장(아트&뮤직 큐레이터)

인생의 반려자로 함께 살아온 지 만30년 된 남편이 지난해 12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다 돌고 올해 회갑을 맞았다. 예전 같으면 노인이라 불렸겠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야. Amor Fati’라는 노랫말이 어울릴 정도로 활동적인 젊은 노인(Active Senior)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한평생 고군분투에 마음이 짠해지고, 젊은 세대 신조어 또는 줄임말에 익숙하지 못해 가족 간 대화에서도 주춤대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소위 ‘꼰대’가 아니라 해도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IT시대에 세대 구분이 더욱 세밀해져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이후는 X세대(1965~1980년 출생), Y세대(1981~1996년 출생), Z세대(1997~2010년대생)로 불린다. 밀레니얼(Y)세대와 Z세대를 ‘MZ세대’라 하는데 서울 인구의 35.5%를 차지하며 최근 사회·문화·경제·정치 등에서 떠오르는 다크호스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스윙보터로서의 그들을 잡기 위해 고심한다.

‘MZ세대’ 전성기에 필자는 도시권 밖에서 활동하는 예술인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다. 어떤 예술인은 진보적 가치를 세워 신념대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적당한 타협과 용인을 통해 소위 ‘순수예술’을 지향하고, 어떤 경우에는 보수 혹은 보수로 위장된 극단으로 나간다. 필자 같은 생계형 예술인들에게 정당 활동은 용기와 포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집권자의 성향과 의지에 따라 투자의 질과 양이 결정되는 것을 보아왔기에 그러하고, 직접적 참여에 대한 타 예술인들의 염려 혹은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인도 시민이고, 사회적 인간이고, 정치적 인간 즉 유권자인 만큼 마냥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 수는 없다.

예술과 정치의 세계는 별개인 듯 하지만 사실 양자의 밀월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는 오페라의 황제 바그너의 광팬으로서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침략자나 독재자의 이미지를 벗고자 바그너의 음악극을 상시로 연주하게 했다. 또 피카소는 1937년 게르니카 대학살을 그림에 표현해 참여적 예술인으로 분류되기도 하며, 개인주의를 벗어나 공산주의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다.

정치적 사연이 있는 음악을 한 곡 소개한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단골 메뉴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sch)’이다. ‘라데츠키(Joseph Radetzky,1766-1858)’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군으로서, 19세기 중엽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일대에서 벌어진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전쟁에서 30만명 이상이 학살됐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남아 그의 이름을 딴 행진곡까지 추서됐다. 반면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철천지 원수가 됐다. 라데츠키 장군이 빈으로 개선할 때 요한 스트라우스 1세가 이 곡을 헌정했는데, 그는 이 일로 반혁명자로 낙인 찍혀 해외로 도피했다는 설까지 돌았다. 하지만 지금, 이 곡이 오스트리아의 국민 행진곡이 돼 있으니 ‘세월이 약이라는 말’, 허튼 소리는 아니지 싶다.

독자들도 한 번쯤 이 곡을 감상하며 범띠 해를 맞이함은 어떨까? 라데츠키 장군이 빈으로 개선하는 모습과 자신을 동일화(Identification)해보는 것, 2022년으로의 행진곡으로서 말이다. ‘Tiger or Cat!’,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로 전락할 것”이란 말을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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