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리쟁이들
[칼럼] 소리쟁이들
  • 내포뉴스
  • 승인 2022.06.0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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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시인 · 노동문학관장)
정세훈(시인 · 노동문학관장)
정세훈(시인 · 노동문학관장)

삶의 동지 아내는 그들을 보고 “지긋지긋하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이처럼 지독한 건 처음 본다”며 몸서리를 쳤다. 우린 그런 그들과 두 차례에 걸쳐 사생결단의 대결을 펼쳤다. 그 대결은 한번 붙었다 하면 보름 이상 지속되었다. 우린 공격자가 되어, 주로 아침과 저녁나절에 그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햇볕이 뜨거운 한낮에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며 무모한 짓이었다. 전쟁이나 다름없는 대결을 두 번에 걸쳐 달포 정도 치렀다. 한 차례는 노동예술제를 앞두고 치렀으며, 또 한 차례는 마친 후 치렀다.

그들의 방어망은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 무엇보다 그들의 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반면 공격자인 우린 단 두 명이었다. 숫자에서부터 열세였다. 공격하다가 이내 지치곤 했다. 그들은 노동문학관 앞뜰 45도 경사지에 심어놓은 1천 5백 그루의 영산홍 사이사이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영산홍을 심기 전 인부들이 제거 작업을 했음에도 건재하게 남아 있었다. “꼼꼼하게 작업한다고 했지만, 미처 캐내지 못한 뿌리가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그들은 인부들의 예상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경사지는 2년 전 여름, 60년 만에 전국적으로 쏟아진 기록적인 폭우 속에서 노동문학관을 건축하면서 무너져 내릴까 봐 노심초사했던 곳이다. 당시 나는 경사지의 붕괴를 막기 위해 부직포와 비닐 등으로 겹겹이 덮어 놓았었다. 그들이 무성하게 군락을 이룬 곳은 붕괴의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어 제외했다. 폭우가 멈추고, 건축도 마친 가을날에 나는 그들의 여문 씨를 받아 경사지 전면에 골고루 뿌렸다. 지난해 봄 그들은 뿌린 씨에서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고 기존의 뿌리에서 잎을 피웠다. 엄청나게 번식해서 여름날 폭우에 경사지를 지켜주길 바란 내 기대에 부응했다.

지난 3월 초 나는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노동문학관에서 개최한 노동예술제를 앞두고 경사지에 영산홍을 심기로 했다. 관람객들에게 봄꽃이 만발한 좀 더 아름다운 노동문학관 경내를 보여주고 싶었다. 경사지에 영산홍이 뿌리를 내려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폭우로 인한 붕괴 우려도 그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란 확신도 섰다.

계획대로 지난 3월 중순, 경사지에 영산홍을 심었다. 그들과의 본격적인 대결은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4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영산홍 사이사이에 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성장 속도가 유난히 빠른 그들에 경악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그 기세로 어린 영산홍을 뒤덮어 버릴 것이었다.

낫과 칼로 그들의 잎을 베고 잘랐다. 그러나 그들은 며칠이 지나자 보란 듯이 잘린 곳에서 새싹을 다시 냈다. 경사지에서 그들의 존재를 아예 없애기로 했다. 그들의 뿌리를 캐어 뽑아냈다. 오랜 세월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팔뚝 굵기의 뿌리를 1미터 가까이 땅속 깊이 내린 것도 있었다. 이들을 뽑아내기 위해 영산홍을 들어냈다가 다시 심었다. 그렇게 노동예술제 개최 전과 후에 서너 바지게를 뽑아내어 노동문학관 어귀 풀 섶에 버렸다.

“미용실에서 들은 말인데 글쎄 그들 뿌리가 머리를 빠지지 않게 하고 굵게 한다네. 말려서 끓인 물로 감으면 좋대요.” 요즘 부쩍 심하게 빠지는 내 머리를 보고 건네는 삶의 동지 말에 갈퀴와 소쿠리를 챙겨 들고 그들을 버린 곳을 찾아갔다. 버린 무더기를 갈퀴로 헤집으며 발견한 그들의 놀랍도록 경이로운 모습에 나는 벌어진 입을 냉큼 다물지를 못했다. 그들은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뿌리에서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뿌리에서도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들을 소쿠리에 고이 담았다. 담으며, 나는 만감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모습에 민중의 삶이 한없이 클로즈업오버랩 되어, 눈물이 나왔다. 앞으로 그들과 대결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다시는 경사지에 남아 있는, ‘소리쟁이들’과 대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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