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존’과 ‘존재’
[칼럼] ‘자존’과 ‘존재’
  • 내포뉴스
  • 승인 2022.08.2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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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시인 · 노동문학관장
정세훈 시인 · 노동문학관장

얼룩이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습니다. 지난 7월 22일 내포뉴스에 실린 제 칼럼 <구속>에 등장한 얼룩이입니다. 어젯밤 잠을 못 이루며 살아나길 기원한 강아지입니다. 치료되면 노동문학관으로 데려오려 맘먹었던 강아지입니다. 지난 5월 초 가스 폭발사고로 주인과 거처를 잃은 떠돌이 강아지입니다. 동무가 되어 함께 떠돌던 강아지 흰둥이가 버스 길에서 트럭에 깔려 죽은 후 홀로된 강아지입니다.

무섭고, 외롭고, 배고픈 극한의 처지에도, 세상에 구속당하지 않으려 한 당당한 강아지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구속당하지 않으려는 그의 ‘자존’과 ‘존재’를 최대한 배려해서, 멀찌감치 밥을 놓아주고 물러났던 강아지입니다. 며칠 전 동물 보호단체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충남에 지부 등이 없다는 이유로 신속한 구조 조치가 안 된 강아지입니다.

폭우 속 송고 마감일이 임박한 원고 작성을 마무리하고 노동문학관 주변의 폭우 상황을 살폈습니다. 건물 좌우와 뒤를 살피고 앞마당으로 온 순간, 문학관 앞 길가에 주차해둔 대형 트레일러 아래서 고통스러운 강아지의 신음 소리가 폭우 속을 뚫고 끊어질 듯 들려왔습니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얼룩이가 꼼짝 못하고 신음하며 쓰러져 있었습니다. 줄곳 10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던 얼룩이가 가까이 다가가도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크게 다친 것을 직감했습니다. 상태를 보아 사고를 당한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습니다. 읍사무소와 119에 긴급 구조요청을 한 후 흐르는 빗물 속의 얼룩이를 종이박스를 깔아놓은 곳으로 조심히 옮겨놓고 우산을 받쳐 주었습니다. 그 순간 무언가 간절한 얼룩이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얼룩아 조금만 견디어라. 너를 구조하는 분들이 오고 있다.”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얼룩이가 제게 처음으로 곁과 손길을 허락한 순간입니다. 

구조대를 기다리는 1시간 남짓한 시간이 1년만큼 길게 느껴졌습니다. “선생님 이 아이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구조팀에게 얼룩이의 사연을 말해 주었습니다. 얼룩이가 살던 집의 가스폭발이 워낙 큰 사고여서 구조 일행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비가 많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결정사항을 신고자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떠돌이 강아지 얼룩이는 자신이 떠돌던 구역을 떠났습니다. “얼룩아! 꼭 살아야 한다. 기도할게.” 전능과 평안과 위로의 하나님, 얼룩이와 동행해 주세요.

오늘 아침, 연락을 받았습니다. 병원 진찰 결과 골반과 다리, 척추 등 네 곳의 뼈가 부서지고, 하체 신경마비가 와서 의료진과 관계자들의 의견으로 안락사를 시켰답니다. 어제 구조대가 오는 동안 곁에서 보살피는 나에게 거울 같은 눈망울을 보여준 얼룩이가 자꾸 눈에 밟힙니다.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한없이 맑고, 선하고, 그 무엇보다 무엇인가 간절한, 그 눈망울이, 글을 쓰는 이 순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얼룩아! 진즉 노동문학관으로 와서 살았으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잖아.” 사경을 앞두고 있는 얼룩이에게 참으로 못된 말을 했습니다. 얼룩이가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지 않으려 한, 얼룩이의 ‘자존’과 ‘존재’를 무참히 밟아버린 못된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 진정한 사죄 없이, 적반하장으로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선행조건으로 이것저것 요구하는 일본의 날강도 폭력배 짓과 다름없는 말입니다. 글을 쓴 날이 제77주년 8.15 광복절입니다.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존’과 ‘존재’를 공고히 해야 할, 그리하여 진정한 일제 해방과 광복이 되어야 할 날입니다. 얼룩이에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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