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독립운동가 선양사업회 릴레이인터뷰②] 김월배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중국지부장
[충남독립운동가 선양사업회 릴레이인터뷰②] 김월배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중국지부장
  • 장현호 기자
  • 승인 2022.10.31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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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서 발로 뛰는 독립투사 추모·선양의 선봉장
“산화한 영령 추모는 제2·제3의 영웅 탄생의 밑거름”
지난 10월 21일 내포뉴스 작은도서관을 방문한 김월배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중국지부장. 그는 공동 저술한 『윤봉길, 동북아에 평화를 묻다』를 펴들고 호국영령 선양사업의 당위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장현호 기자
김월배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중국지부장이 내포뉴스 작은도서관을 지난 10월 21일 찾았다. 그는 공동저자로 참여한 ‘윤봉길, 동북아에 평화를 묻다’를 펴들고 호국영령 선양사업의 당위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문효덕 기자

“저는 중국에서 18년 가량 살았어요. 낯선 외국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이유가 뭐냐고들 많이 묻죠. ‘애국심’ 때문에 외국 나가 삽니다”라며 울림을 주고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한국말을 하면 조선족인 줄 알더라”며 웃음을 준 오늘의 주인공.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중국지부장이면서 중국 하얼빈 이공대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는 김월배(55) 교수다.

그는 태안군 안면도 출신으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특별하게도 지금은 독립투사 추모·선양의 선봉장이 되어 그들의 업적을 퍼뜨리는 전달자이면서 기록해 남기는 작가로 지낸다. 코로나19가 지구촌을 덮치기 전에는 타지에 묻힌 선대의 유해와 업적들을 찾으러 발품 팔고 다녔다고.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것 같다”고 묻자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되지 않느냐”며 겸허한 대답이 돌아왔다.

김월배 교수가 하얼빈에 첫발을 디뎠던 때는 2005년. 지인의 권유로 하얼빈의 한 백화점 앞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설립하는 행사의 실무자로 가게 됐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우연히 이웃나라를 방문했던 때부터 과거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역사와 연이 닿았고, 그것이 저를 본격적인 타지생활로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2008년 4월 29일, 지부장 김월배 교수를 중심으로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중국지부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동북아 평화축제를 위한 집단으로 출발해 윤봉길 청소년 답사단, 중국 대학 유학, 중국서 활동하는 타 선양사업회와의 교류를 주도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자매결연(MOU) 등을 성사시키며 왕성히 활동하던 그였지만 ‘윤 의사가 이곳에서 큰 업적을 달성했는데, 그의 유적지를 소개하는 변변한 책자 하나도 없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외국에서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지내던 김월배 교수.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는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김 교수는 “올해가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 90주년인 만큼 우리 국민들께 윤 의사의 가려진 부분을 재조명하고자 한다”며 “‘중국인들이 윤봉길 의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 관점에서 전달해야겠다’는 마음에 이번 포럼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백 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서 주권이 유린당했던 일이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며 “그래서 지금 우리가 독립운동가를 선양하며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라 밝혔다.

덧붙여 “과거 나라가 어려웠을 때 노력하셨던 분들을 기억하고 선양해 드린다면 또다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꺼이 살신성인 할 수 있는 제2, 제3의 윤봉길이 나올 것”이라며 선양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김 교수는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중국과 일본, 몽골에 더해 연해주에 사는 외국인들과의 끊임없는 교류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인터넷을 통한 화상 세미나 등의 방법으로 민간의 영역은 끊임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라며 “중국의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초청해서 윤봉길 의사를 중국에 더 알릴 수 있는 객관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기회가 된다면 월진회의 전문 연구원이 되어 제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윤봉길 의사를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며 끝맺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다. 19세 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에는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다. 22세에는 월진회(月進會) 수암체육회를 조직, 농촌운동 민족운동을 더욱 정열적으로 전개했다. 1930년 3월 6일 23세의 나이로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향했다. 일본군이 1932년 4월 29일 천장절 겸 상해 점령 기념식을 홍구공원에서 열자 단신으로 군정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했고,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을 섬멸했다. 직후 일본군에 체포됐고, 같은 해 12월 19일 장렬히 산화했다. 홍구공원 의거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렸던 성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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