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시 새기는 윤 의사의 ‘강의한 사랑’
[칼럼] 다시 새기는 윤 의사의 ‘강의한 사랑’
  • 내포뉴스
  • 승인 2022.11.0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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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본(월진회부회장·시인·한국문인협회제도개선위원)
임종본(월진회부회장·시인·한국문인협회제도개선위원)

그는 1930년 3월 6일 아침, 오로지 ‘강의한 사랑’을 품고 자신의 굳은 결심을 써내려갔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일제를 몰아내어 해방의 날이 오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유서를 적었다. ‘아내가 차려 준 마지막 밥상을 받았으나 아내와 두 돌 지난 아들 종(淙)이 눈에 밟혀 밥알을 넘기지 못했다’ 고 후일 일기장에 그 기록을 남겼다.

올해는 국제도시 상하이 소재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천장절)에 거행된 윤봉길 상하이 의거 90주년이다. 상하이 의거 90주년을 맞는 중국인의 평가는 윤봉길 의사를 바라보는 척도가 될 것이다. 서명훈 선생과 하얼빈 이공대 김월배 교수는 2013년부터 상하이 도서관 근대사자료실과 하얼빈도서관, 심양도선관등에서 상하이 의거 사건을 보도한 상하이 <신보>, 난징의 <중앙일보>, 텐진의 <대공보> 등 19개 신문에 실린 235편 기사와 18개 잡지에 실린 27편의 글 및 시사를 수집했다. 

총 37개의 신문잡지, 262편의 뉴스와 글이 수집 되었다. 이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윤봉길 의사를 마음속으로 극히 존경하고 탄복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고 김월배 교수는 회고 했다. 

중국 신문에서 윤봉길의사를 항일의사, 항일지사, 항일용사, 항일장사, 항일열사 등으로 부르며 기리고 있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윤 의사의 영웅적 기개와 자주독립을 위해 두려움을 모르는 희생정신은 항일정신의 모범이 되는 것으로써 중국 청년들이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여겼다. 상하이 여류작가 한고평은 <대항>이라는 민국주간잡지 1933년 제8기에 <한국의사 윤봉길의 죽음> 이라는 시사평론을 아래와 같이 발표하였다. ‘약소민족이 제국주의와 싸우고 희생한 선구자이다. 그의 정신, 그의 용기, 그의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탄복하도록 하였다.’ 고 의사의 정신을 고취 시키고 있다.

한편 주혜삼이 주필인 <중화민국 역사 기요>라는 책에 철유민이 쓴 <윤봉길은 폭탄을 투척하여 마귀들을 소멸>이라는 글이 1932년4월29일의 조목에 수록 되었다. 그 글에서 윤봉길 의사는 ‘하늘을 이고 땅위에 우뚝 선 이 사나이는 인류역사 상 제일 위대한 자객으로서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 고 칭찬했다. 위와 같이 중국인들은 윤봉길 의사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표시하는 동시에 중국인들은 윤봉길 의사를 중국의 민족영웅으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사 이후 머리부터 허리까지 온 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의사는 때때로 얼굴에 희망의 미소를 지었다. 윤봉길을 압송한 일본 헌병인 스기야마의 말에 따르면 ‘윤봉길은 체포되었을 때부터 홍구공원 근처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갇혀 있었다.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목이 떨어지고 뼈가 부서져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식사도 평소와 같다. 윤봉길의 안색이 백지처럼 유난히 창백했지만 영리하고 눈빛은 횃불 같아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도가 태연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헌병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고 밝힌바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윤봉길 의사의 ‘강의한 사랑’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역사적인 항일운동의 단초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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