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지(無地), 가장 무서운 것이다
[칼럼] 무지(無地), 가장 무서운 것이다
  • 노진호 기자
  • 승인 2023.03.1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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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본 (사)매헌윤봉길월진회 부회장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91주년을 맞이하며

윤봉길은 덕산의 시량리 도중도(島中島)라는 마을에서 윤황과 경주김씨의 큰아들로 1908년 6월 21일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 부인은 용처럼 우람하게 생긴 구렁이가 입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한다. 그가 출생한 집은 1974년 보수하면서 ‘빛이 나타나는 집’이란 뜻으로 광현당(光顯當)이라 했다. 윤봉길이 세 살 되던 해인 1911년 도중도에서 다리 하나 건너 이웃으로 이사했다. 이사 한 집은 저한당이라 했는데 이는 ‘한국을 건져 낸다’는 뜻이다.

윤봉길은 오치서숙을 나온 뒤 사랑방에 서당을 차리고 아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이 됐다. 아동들에게 천자문뿐 아니라 한글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사실을 ‘17세에는 개도 아니 먹는 똥을 누는 사람이 됐다’라고 훗날 ‘자필 이력서’에 적었다. 18살이던 1926년 가을 친구들과 함께 야학당을 개설했다. 윤봉길이 야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오치서숙에서 공부할 때 겪었던 공동묘지 묘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마을의 공동묘지 쪽에서 나무로 된 묘표(墓表)를 한 아름 들고 오는 낯선 아저씨를 만났다. 오랜만에 온 탓에 아버지의 묘를 확인할 수 없어 주위의 묘표를 모두 뽑아 와서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윤봉길은 그분이 말한 나무 푯말을 쉽게 찾아냈다. 그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온 듯이 기뻐하였다. “그런데 혹시 이 푯말 뽑은 자리에 무슨 표시라도 하셨소?”라고 묻자 그 청년은 멍하니 푯말을 바라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 선친의 묘표는 찾았지만 산소는 어떻게 찾으려 하시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묘는커녕 다른 이의 묘 주인도 구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때 윤봉길은 철권 통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무지’(無地)라는 사실을 깨닫고 야학을 열게 된 것이다.

야학에 공부하러 오는 이들이 처음에는 몇 명 없었다. 낮에 농사 일을 하고 저녁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야학을 시작했는데 학생이 늘어나자 마을 어른들의 도움으로 3칸짜리 교실을 지었으며 그 학당이 부흥원이다. 이때부터 예산에서 윤봉길은 틈틈이 일본어를 독학했고 1930년 4월 3일 단둥에서 배를 타고 칭다오에 도착하여 일본인 나가하라 겐타로의 세탁소에 취업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적을 알기 위해 적진에 침투한 격이다. 당시 일본은 중국 침략 전초기지로 칭다오를 산등성 공략의 전초기지로 만들었다. 세탁소에서 열심히 일을 해 6개월을 지나니 제법 돈이 모아졌다. 1930년 10월경 월진회 공금 60원을 갚기 위해 고향으로 50원을 부쳤다. 당시 월진회비가 개인당 월 10전이어서 공사가 분명한 윤봉길은 빨리 갚기 위해 노력했고 일제 경찰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수해 위문금’으로 보냈다.

이때 선천에서 만나 단둥까지 함께 온 한일진은 조선 독립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미국으로 가기 위해 윤봉길과 같이 칭다오에 왔다. 한일진은 예상과 달리 미국행 배삯이 비싸 칭다오 도착 6개월이 지날 때까지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 윤봉길은 자신도 어려운 형편인데 칭다오에서 노동을 해서 벌면 된다며 175달러를 주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소식을 들은 한일진은 미국에서 1932년 12월 19일 예산 집으로 25달러를 보내 일부를 갚았다.

윤봉길 부인 배용순 여사는 그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살림을 꾸렸는데 재봉틀을 보면 남편이 생각나 남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윤봉길 의사가 걸어온 그 길을 우리 윤봉길시낭송&합창단은 상하이 의거 91주년을 맞이해 ‘영웅의 길’로 극화했으며 ‘윤봉길 의사의 길을 묻다’로 연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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