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참 잔인한 봄
[시론] 참 잔인한 봄
  • 허성수 기자
  • 승인 2020.04.0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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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수 취재국장, 소설가

1980년 3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갑작스런 서거로 18년간 지속됐던 군사독재가 끝나고 그 이듬해 처음 맞이한 봄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당시 가슴 설레며 온 국민이 정치적인 봄을 기대했던 건만 현실은 정반대로 겨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직을 잠시 이어 받았지만 그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의 뒤에 실세가 따로 있었다. 바로 전두환 장군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은 10‧26 대통령 저격사건의 수사를 지휘하면서 갑자기 권력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전 소장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보다 훨씬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해 투옥시키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군부의 움직임에 적잖게 실망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1980년 새 학기가 되자 어서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촉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은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정권을 손아귀에 넣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해 나갈 뿐이었다.

그 해 봄 나는 신입생으로서 대학생활을 처음 맛보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5년 만에 제도권 학교로 돌아왔기에 학문을 하는 친구들을 모처럼 만나 어울리는 것이 몹시 기쁘고 즐거웠다. 나는 고교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대신 10대 후반의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사회생활을 했다. 가게의 점원과 주물공장 철공 등의 일을 하면서 주경야독을 했다. 고교졸업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해 재수학원에 다니며 예비고사를 준비했다. 결국 대구의 한 사립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데모를 일삼는 선배들에게 실망하면서 대학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꼈다. 그러나 그 해 5월부터는 나도 시위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으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초봄에만 해도 일부 학생들만 참여하던 시위에 거의 전교생이 합류하면서 정문 앞은 매일 전쟁터로 변했다. 방패와 철망으로 얼굴까지 가린 헬멧으로 무장한 전투경찰과 매일 전투가 벌어졌다.

경찰은 곤봉과 군화발로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했고, 학생들은 이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가진 가장 고약한 무기는 최루탄이었다. 페퍼포그 차에서 쏘아대는 최루탄이 시위대로 향해 날아와 터질 때는 마구 쏟아지는 눈물과 콧물에 숨도 쉬기 어려웠다.

나는 한번은 정문 앞 거리시위에서 제일 앞줄에 섰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날 따라 전투경찰이 정문에서 멀찌감치 후퇴를 한 채 시내의 큰 도로 양쪽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50여m 쯤 되는 정문 진입로는 물론이고 T자로 만나는 왕복 4차선 도로도 상당한 거리로 비워놓은 채 양쪽에 전투경찰이 여러 겹으로 진을 치며 교통을 통제했다. 학생들은 정문 밖으로 나가 시내 도로를 차지하고 양쪽을 차단한 전경들과 대치했다. T자의 공간은 해방구였다. 거기서 우리는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대중가요나 동요를 개사한 저항가요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 완전무장을 한 전투경찰은 꼼짝도 하지 않고 경계태세로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전경들의 저지선을 넘어가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축제나 다름없었다. 풍물반 학생들이 신명나게 농악을 하며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일제히 전경들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평화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때 나는 앞에서 서너 줄 쯤에 서서 학우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공격해오는 전경들의 곤봉세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뿐만 아니라 마구 터지는 최루 가스에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전진할 수가 없었다. 맨 앞줄에 섰던 학생들도 뒤돌아서 도망가기 바빴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전경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사력을 다해 정문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결국 우리는 학교에서 단체로 시내 번화가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략을 바꿨다. 개별적으로 동성로에 나가 집결하기로 했다. 그 날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대구시내 중심가를 돌며 시위를 하고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리 학교는 대구에서 제일 먼저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며칠 후에는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발령으로 모든 대학이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개학은 그해 9월 15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려 4개월간 기약 없는 방학으로 지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휴교가 길어지니까 6~7월쯤 학교에서 과제를 내주고 우편으로 제출하도록 했다. 리포트를 제출받아 기말고사를 대신해 성적을 내고 한 학기를 마친 것으로 학사처리를 했다.

초봄에 대학생활을 잠깐 맛봤다가 갑작스런 휴교로 집에서 쉬게 되니 처음 한 달 정도는 지낼 만 했으나 그 다음 달부터는 학교가 너무 그리웠다. 그러나 학교에 달려가 보면 정문을 가로막은 장갑차 양 옆으로 무장군인 네댓 명이 곧 발포라도 할 것처럼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정문 너머 초록색으로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진 이오니아식 열주의 현관을 가진 붉은 벽돌건물을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2020년 봄 모처럼 휴교가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다. 40년 전에는 대학교만 휴교했지만 지금은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까지 모든 학생이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집에서 머물며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대체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종 감염병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의 학생들이 이 같은 사태를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학교라는 공동체는 공부뿐만 아니라 학우들과 어울리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코로나가 어서 물러가고 다정한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만나 우정을 쌓으며 학창의 낭만을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참 잔인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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