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오지마을 신동리를 변화시킨 오필승 목사
홍성군 오지마을 신동리를 변화시킨 오필승 목사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9.12.0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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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살리기에 나서 오누이권역 42억 사업비 유치하며 마을 지도자로 변모
오필승 목사, 그는 신동리 마을 이장이기도 해 이장목사로도 불린다. 그가 목회하는 신동리교회는 한옥을 절충한 목재건물로 작고 아듬하다.
오필승 목사, 그는 신동리 마을 이장이기도 해 '이장목사'로도 불린다. 그가 목회하는 신동리교회는 한옥을 절충한 목재건물로 작고 아담하다.

나무로만 지은 작은 교회가 참 아름다웠다. 홍동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신동리 마을 어귀에 세워진 신동리교회는 한옥과 절충한 친환경적인 건축물로서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졌다. 

신동리는 충남 홍성군 장곡면 오지에 속하는 시골마을로 16년 전 이 지역과 아무 연고가 없었던 오필승 목사가 들어왔다. 그가 신동리에서 첫 목회를 할 때는 자립이 어려운 농촌교회 형편상 먹거리를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농사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2005년 교회당을 건축한 그는 2006년 논 네 마지기 반을 빌려 친환경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홍동면 문당리마을에서 실시하고 있던 오리농법을 도입했다가 나중에는 우렁이농법으로 흑미 농사를 지어 도시교회에 판매하기도 했다.

오 목사는 2010년 농사를 제대로 배워서 지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충청남도 농업기술원에서 문을 연 귀농대학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주 1일 8시간씩 총 100시간의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그는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공부를 했다. 이때 목회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왔다. 

신동리교회 앞에는 홍동저수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자가 있다. 오누이권역 사업비로 지었는데 오 목사의 절친한 친구인 한국고전번역원 서정문 고전번역연구소장이 '동리희우정기'라고 정자 이름을 지어줬다.
신동리교회 앞에는 홍동저수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자가 있다. 오누이권역 사업비로 지었는데 오 목사의 절친한 친구인 한국고전번역원 서정문 고전번역연구소장이 '동리희우정'이라고 정자 이름을 지어줬다.

“귀농대학에서 전북 진안으로 1박2일 견학을 가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농촌이 소멸할 수도 있는 위기감을 느끼던 터에 농촌을 살릴 수 있는 답을 찾아 나섰지요. 농촌이 살아야 지속가능한 선교도 할 수 있거든요.”

다행히 그는 진안에서 그 답을 찾았다. 

“진안에서는 귀농·귀촌인모임이 농촌에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새로운 사람들이 농촌에 계속 들어와야 지속가능한 농업과 농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죠.”

또 그는 진안군 용담면 와룡마을 22가구의 주민들이 영농조합을 구성해서 가공공장을 만들어 직접 짠 기름을 직거래로 판매하고 펜션도 운영해 높은 소득을 올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그 후 귀농대학을 수료하면서 그는 네 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홍성군 귀농·귀촌인단체 만들기, 둘째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기, 셋째는 직접 운영하는 수세미농장을 체험농장으로 만들기, 넷째는 신동리마을에 박물관 만들기 등을 적었다.

교인들을 위한 목회자로서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와 마을을 살리기 위한 밀알이 되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농촌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고 사역의 범위를 확대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마을주민 중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현재 65가구 중 15명으로, 오 목사 가족을 포함하면 전체 교인은 17명이다.

구 마을회관 2층을 리모델링해서 마을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오필승 목사가
구 마을회관 2층을 리모델링해서 마을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오필승 목사가 신동리 마을에 1910년대에 세워졌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감리교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로교 통합교단 소속인 오 목사가 신동리교회 개척 초기에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돼 마을 홍보관에도 게시물로 만들었다.  

오 목사가 처음 부임해왔던 2003년도만 해도 신동리는 80가구였다고 한다. 그 동안 사망하거나 이농을 하면서 15가구가 줄어든 것이다. 자연히 교인도 줄면서 교회마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를 위기감을 느끼면서 오 목사는 골방에서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네 가지 계획을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2011년 3월 16일 홍성군귀농지원연구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았다. 2012년에는 귀농귀촌지원센터를 홍성군농업기술센터에 개설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계간 ‘귀농생활’을 창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농림부로부터 도시민 유치사업이 선정되어 2012~14년 3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14개의 귀농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2015년에는 신동리교회 안에 예장홍성귀농상담소를 개설했다.

오 목사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사업도 적극 추진했다. 2011년 4월 13일 신동리마을회관에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사례발표 및 주민토론회’를 개최했다. 신동리는 물론 인근 지정1·2리, 도산2리 등 4개 마을 이장들이 참여한 가운데 인근 홍동면 문당리 주형로 대표와 구항면 거북이마을 조영석 대표를 강사로 초청해 성공사례를 들은 후 오 목사가 ‘장곡저수지권 농촌체험관광단지 개발’에 대해 발제를 했다. 

마을 주민들이 박물관 전시를 위해 내놓은 소품 가운데 각종 대패도 있다. 벽에는 주민들이 젊은 시절 단체로 여행가서 찍은 기념사진들도 붙여놓았다.
마을 주민들이 박물관 전시를 위해 내놓은 소품 가운데 각종 대패도 있다. 벽에는 주민들이 젊은 시절 모습이나 단체로 여행가서 찍은 기념사진들도 기증을 해 붙여놓았다.

이 같은 사례발표와 주민토론회를 통해 강하게 동기를 부여받은 주민들은 그 다음달 5월 ‘장곡살기좋은마을만들기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오 목사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사무국장을 맡았다. 2011년 말 이러한 활동상황을 전해들은 홍성군으로부터 사업계획서 제출을 요구받고 오 목사는 주민토론회 때 자신이 발표한 내용을 PPT로 30쪽 분량을 제작해 제출했다. 얼마 후 군청에서 ‘농촌마을종합개발 예비권역사업지’로 선정되었다는 결과가 답지했다. 

“그때 군에서는 여기만큼 준비가 잘 된 사업계획서를 낸 곳이 없다며 칭찬을 하더군요. 그 후 컨설팅 회사를 붙여주고 마을에 대해 자원조사를 한 후 새롭게 사업계획을 세우게 했어요.”

새로 컨설팅을 받아 세운 사업계획서는 충남도를 거쳐 2012년 5월 농림부에서 최종 사업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42억8천만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아 신동리를 비롯한 지정1·2리와 도산2리, 4개 마을이 ‘오누이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에 들어가면서 활력을 되찾게 된다. 

오 목사는 자신이 운영하던 수세미농장을 농업기술센터 공모사업을 통해 3천만원을 지원받아 신동리체험농장으로 만들었다. 주말농장 숙소도 지어 귀농귀촌 합숙교육장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단체모임을 위한 장소로도 제공하고 있다. 

마을박물관도 홍성군농업기술센터 공모사업으로 선정되어 지원받은 5천만원으로 구 마을회관 2층을 수리해서 개관했다. 2015년 문을 연 마을역사홍보관에는 주민들이 옛날에 쓰던 농기구, 연장, 뒤주, 관혼상제에 쓰던 각종 도구와 재봉틀까지 지금은 쓸모없게 된 온갖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벽에는 주민들로부터 옛날 사진들도 기증받아서 붙여놨는데, 오래 전 풍습이나 세련된 옷차림은 아니지만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게 하는 소품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신동리교회 현관문은 옛날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대문이다. 물론 작은 예배당에 맞게 크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신동리교회 현관문은 옛날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대문이다. 물론 작은 예배당에 맞게 크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귀농대학을 수료하면서 계획했던 오 목사의 네 가지 꿈은 결국 모두 이뤄졌다. 다만 그가 꿈도 꾸지 않았던 마을 이장은 2013년 1월 주민총회에서 선출돼 올해 7년째 맡고 있다. 2012년 농림부로부터 42억이라는 거액의 프로젝트를 따내면서 탁월한 기획력과 남다른 추진력을 보여주자 주민들은 하나같이 그를 마을 지도자로 지지했다. 오 목사는 극구 사양하다가 수락했다. 

“제가 원주민도 아닌데 더욱이 비기독교인들이 많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목사를 이장으로 세워야겠다는 것은 마을이 더 발전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필승 목사, ‘이장목사’로도 불리는 그는 농촌의 작은 마을 작은 교회에서 목회, 그 이상의 목회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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