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예산 연극의 태동
[칼럼] 예산 연극의 태동
  • 노진호 기자
  • 승인 2022.04.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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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문학박사·동신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예산 연극의 시초는 윤봉길 의사이다. 1929년 1월호 조선농민지에 실려 있는 글을 보면 1929년 2월 28일 학예회의 각본은 이러했다.

연극 제목: 토끼와 여우, 극본·연출: 윤신득, 등장인물: 토끼(인이길)·거북이(이한규)·여우(정종갑) 등으로 대강이 잡혀졌다. 학예회가 시작됐다. 지방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서 관중이 운집했다. 축음기와 팔도의 된 노래 가락을 쉬지 않고 뽑아냈다. 시대에 휩쓰는 명곡이 터져 나왔다. 처음 보는 상자 같은 곳에서 노래가 퍼져 나오는 것이다. 사실 이즈음 축음기는 여간 부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가 없었다. 윤신득의 처인 구씨가 가호(家號)이기에 가지고 있는 것을 윤신득이 극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틀어 놓은 것이다. 참으로 신명나는 일이다. 열 살도 안 된 ‘아망례’가 사뿐 무대 중간에 올라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우리의 학예회에 많은 손님이 와서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개회를 선언했다. 관중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조리 앙증맞게 어린이가 깍듯이 인사말을 하는 것에 대해 배워야 산다. 배워서 안 될 것이 없다고 경탄이다.

윤봉길 의사는 농촌 계몽운동을 통해 공통체 정신을 강조했으며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과 독립정신을 주창했다. 박창식은 충남 예산군 응봉면 송석리 37번지에서 본관은 밀성, 박덕문의 장자로 출생했다. 유년 시절 한학을 공부하고 오가보통학교(9회)를 입학하고 예산제일교회에서 연극문화 활동을 주도했다. 해방 후 극단 ‘태극좌’를 창단하고 창작극 ‘윤봉길 연극’으로 충남 일원을 순회공연을 했다.

1950년 예산 극장이 활동의 중심이 돼 연극기관으로 예농(예산농업고등학교), 방위군 예산지대의 연극단, 예산경찰서 후원을 받던 고향(대표 허영)이었다. 1952년 5월 예농에서 예술제를 개최했다. 성길제 극본의 ‘고구려의 여명’이 공연됐다. 관악, 독창, 합창 등으로 꾸며진 다채로운 프로그램이었다. 이틀간 공연을 했는데 극장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배역은 예산농고 2~3학년 학생들이었고 주연은 이동수였다. 성길제는 30세 전의 예산농고 교사였다.

또 이창구는 예산읍 향천리에서 출생. 출향해 연극인으로서 성공한 인물이다. 1982년 이후 청주로 이주해 1986년 청주 청년극장에서 상임 연출을 맡았고 1991년 이후에 청주대 학장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1985년 3월 10일 극단 ‘소란’(단장 고필규)이 창단됐다. 15명이 예산문화원(원장 이항복)을 근거지로 활동했으며 고필규는 23세로 순천향대학교 재학생이었다.

1986년 9월 26일 예산연극인들을 규합해 ‘예산연극모임’(회장 오규섭)이 출발한다. 장범순 작, 전상필 연출 ‘달팽이들의 연극’이 신라예식장에서 공연됐다. 전상필, 이대열, 민동봉, 박형숙, 김경숙, 고인숙, 김미애가 출연했다. 제2회 공연으로 ‘빛은 멀어도’를 공연했고 박현숙의 희곡집 ‘그 찬란한 유산’을 각색했다. 출연으로 박형, 김경숙, 이미정, 고인숙, 민동봉, 박형숙, 홍순성, 복영선, 이은숙, 스텝에 주용현, 한정심, 신영미, 오규섭이었다.

국가적 지원은 미흡해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됐고 예식장이나 은행 회의실을 이용했다. 1993년 예산군문예회관이 건립되면서 공연장 시대가 열렸고 1996년 극단 ‘단하’(대표 전상필), ‘예촌’ (대표 주선홍)이 창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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