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 황동환 기자
  • 승인 2022.05.18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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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④이동녕
반평생 임시정부에 투신하며 조국광복 위해 투쟁
임정 주석만 네 차례…윤봉길·이봉창 의거 이끌어
사진 가운데가 이동녕 선생이고, 왼쪽이 김구 선생이다. 광복회 충청남도 지부 제공
석오 이동녕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했다. 석오를 비롯한 임정요인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왼쪽부터 김구, 이동녕, 엄항섭 선생. 광복회 충남지부 제공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석오(石吾) 선생님” - 백범 김구

“국회라는 나라 일을 처리하는 기관을 세워 거기서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일을 처리해야만 세계의 발전하는 여러 나라와 맥을 같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석오 이동녕

1869년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출생한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임시헌법·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했으며, 국무총리·국무위원·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뿌리와도 같은 인물이다. 부친은 천안에서 영해 군수를 지낸 이병옥(李炳鋈) 선생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봉소(鳳所)이다.

1892년 24세 때 국가시험인 응제진사 시험에 합격한 이 선생은 28세 때인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이듬해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官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개화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34세 때(1902) 이상재·전덕기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 운동을 전개했던 이동녕 선생은 1904년 36세 때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신채호·조성환 등과 같이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김구·이회영 등과 교류도 이때 시작됐다.

다음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 체포돼 2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그는 만주 서간도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해 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를 설립·운영하하면서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 때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를 조직,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보급했다. 49세 되던 1917년엔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성(吉林省)에서 대종교 김교헌 외에 조소앙·조완구·김좌진·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네 차례에 걸쳐 역임한 석오 이동녕 선생. 광복회 충남지부 제공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로 건너가 정부조직을 모색했다. 마침내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됐다. 동년 4월 13일 동지들과 임정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됐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총장이 됐다. 1920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될 때, 그는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홍진·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24년에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한 그는 군무총장도 겸임했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했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했지만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58세의 나이로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11대)이 된 그는 법무총장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고, 1926년엔 임정 주석(主席)이 됐다. 그는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8년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한성을 발행했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된 그는 임정의 존폐 위기를 극복하고, 두 번째 임정 주석(1930~1932)이 됐다. 이때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이끌었다. 이로 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해야 했다.

1935년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1935~1939)에 올랐을 때는 양우조·엄항섭·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됐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을 구축, 그 진로를 모색했다. 1939년에 또 다시 임정 주석(1939~1940)이 된 그는 김구와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西安)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했다.

임시정부 수립에 투신한 이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정을 이끌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 기강(四川省 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했다. 임시정부에서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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