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8월 29일은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
[칼럼] 8월 29일은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
  • 내포뉴스
  • 승인 2022.08.2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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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식 광복회 충청남도지부 사무국장

‘민족의 피가 끓고 가슴이 찢어지는 날. 골수에 사무친 원한이 수대를 지나도 소멸되지 않을 원통한 날’ 112년전 독립신문에 표현된 경술국치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의 뼛속에 깊이 새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통한, 민족이 오래 되새겨야 할 날”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하지만 8·15 광복절을 국경일로 기리면서도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일을 아는 이는 드뭅니다. 어쩌면 과거에 자연스럽게 쓰던 용어를 말하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요.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합병(韓日合倂)’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양국이 자연스럽게 합해졌다는 뜻으로 사용하던 것이기 때문에 경술국치라고 정정한 것입니다.

역사의 시간을 돌려보면,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며 사실상 통치권을 잃은 상태에서, 1909년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을, 이듬해 6월 경찰권까지 박탈당한 대한제국. 결국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제1조)”라는 조항이 담긴 합병조약을 통과시켰고, 8월 29일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를 넘기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피눈물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 속에 진행된 한일병합조약은 적법한 비준 절차를 무시한 국제법상으로도 ‘무효’인 조약이라고 밝혀졌습니다. 2005년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중인 1910년 8월 29일자 순종 황제의 칙유문 등 한일병합조약과 관련된 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칙유문에는 국새가 찍혀 있지 않고, 모든 법령에 들어가는 황제 친필 서명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하는 어새만 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는 ‘한일병합조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한제국의 전권 위임을 받은 이완용과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재면이 직접 조약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완용과 이재면은 제대로 된 전권 위임을 받은 바 없기에 이 조약의 합법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이며, 애초에 대한제국에는 이런 중요한 사항을 전권 위임하는 규정 자체가 없기에 설령 전권 위임받았어도 원천 무효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환언하면 8월 15일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날이었다면, 8월 29일은 나라를 빼앗기게 된 날입니다. 조국을 빼앗기고 되찾은 날이 함께 있는 8월에 광복과 해방의 기쁨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잃은 국치일에 꼭 조기를 게양하여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경술국치일'은 전국 17개 광역시의회 및 시도지자체 의회에서 조례 제‧개정을 완료, 국치일 당일 전국의 모든 지자체 및 산하기관에서 일제히 조기를 게양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기 때문입니다.

112주기 경술국치일을 맞이하여 다시는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깊은 교훈과 함께, 외세에 결탁하여 우리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친일세력은 반드시 척결해 나가야 한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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