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초까지 15년간 ‘진보 정치 텃밭’
군사정권 초까지 15년간 ‘진보 정치 텃밭’
  • 이번영 시민기자
  • 승인 2024.03.2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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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국회의원선거 76년사 上
여의도 국회의사당 야경. 국회 제공
여의도 국회의사당 야경. 국회 제공

1948년 3월 17일 미군정은 법령 제175호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 남한 만의 단독 총선거를 발표했다. 이 남한만의 총선거 발표에 좌파에서는 물론 중도 우파에서도 강력히 반발하나 이미 주도권은 우익진영의 대표기관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독촉국민회의)와 한국민주당(한민당)에 넘어간 상태에서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홍성에서도 한보국 중심의 인민위원회 계열은 정치활동이 봉쇄되고 유승준의 중도우파가 불참한 가운데 독촉국민회의 홍성군지부장 손재학이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됐다. 손재학은 5명이 출마한 가운데 44.9%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후 중앙에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 여당 자유당이 결성되면서 홍성의 독촉국민회의는 자유당 홍성군당으로 개편돼 명실상부한 홍성의 집권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나라 정부의 헌법과 선거법에 따라 처음 실행한 선거는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였다. 해방 전후 홍성군 자치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등 홍성의 정치사회운동을 주도한 유승준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다가 제2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9명이 출마한 가운데 유승준은 무소속으로 당선됐지만 사실상 야당이었다.

1950년 5월 30일 선거로 구성한 제2대 국회는 개원 일주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에서 활동한 홍성 유승준 의원의 야당 활동은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국회에 불만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의원들을 위해 마련한 술자리에서 유승준은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며 “나라를 팔아 먹으려냐”고 호통을 쳐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친여세력 지도자 김동주는 홍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승준 소환대회를 열기도 했다.

정당에서 후보자를 추천하는 제도는 1954년 3대 국회의원선거부터 도입됐다.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의원들의 불신이 높아지자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대통령 선출을 직선제로 바꾸는 한편 친여세력으로 자유당을 만들어 국회의원 정당 공천제를 도입했다. 홍성에서는 자유당 공천을 받은 김지준이 재선에 출마한 유승준을 물리치고 당선됐다.

유승준은 1958년 4대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다시 출마, 당선돼 재기했다. 자유당의 막강한 조직력과 금권선거 등 악재 속에서 외로운 싸움으로 당선된 유승준은 기적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을 뽑는 선거는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처형당하고 홍성경찰서장과 사찰계 주임 등 8명이 옷을 벗는 4월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민주당 정권 아래 치러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10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8명이 무소속 후보였다. 민주당이 신구파로 갈려 내분에 휩싸이면서 전용안 후보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무소속 김영환과 김두한의 각축전이 됐다. 해방 전후 지역사회운동을 하고 판사를 지낸 김영환(19.86%)이 김좌진 장군 후손을 내세우는 김두한(18.37%)을 꺾고 1.5% 포인트 차이로 당선됐다. 김영환은 무소속이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법무부 차관을 지낸 진보 정치인이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홍성과 청양을 한 선거구로 묶어 1963년 11월 26일 6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했다. 12명이 출마한 6대 선거는 군사정부의 철권통치 속에서 공화당이 김창동 후보를 내세웠지만, 야당인 국민의 당 이상철 압승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민주공화당 김창동의 득표율은 23.45%(1만 9008표), 국민의당 이상철 득표율은 33.15%(2만 6864표)였다.

자유당 이승만정권 시대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부 초기인 1963년 선거까지 15년 동안 홍성은 ‘진보 정치의 텃밭’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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