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면모, 재조명 해야 합니다”
“백야의 면모, 재조명 해야 합니다”
  • 황동환 기자
  • 승인 2020.11.30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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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사업회 양복모 사무총장
기존 사업회와 달라...“학술·문화사업 집중할 것”
홍성 노동운동 산증인...“의료원 노조설립 27곳”
노동운동이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라면 독립운동의 정신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고 보는 양복모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그는 홍성지역 노동운동의 산증이기도 하다.  사진=황동환 기자
양복모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그는 홍성지역 노동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사진= 황동환 기자

청산리 대첩은 우리나라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약 160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이 항공대·포병대·공병대 등 2만여명이 넘는 일본의 정예부대를 상대로 10여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한 반면 독립군 측 전사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던 대승이었다.

그리고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1945년 8·15해방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여전히 도발을 일삼고 있다.

2019년 일본은 일방적으로 반도체 관련 핵심소재들의 한국수출을 금지했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과거 일제의 강제징용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원고승소 판결에 대한 보복성 조치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일본의 이 같은 조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꼴이 됐다. 자발적 ‘일본상품불매운동’이 전국 곳곳서 일어났고, 의류, 맥주, 자동차, 여행 등 여러 영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리고 해를 넘겨 맞이한 청산리 대첩 100주년인 올해 전승의 주역인 백야 김좌진 장군을 재조명하고 청산리 대첩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됐다. 특히 ‘김좌진 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문화사업회(이하 사업회)’는 전승기념일인 지난 10월 26일 홍성에서 출범을 알렸다.

사업회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유지를 계승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출범한 민간단체다. 출범식 자리에서 양승조 충남도지사는 “김좌진 장군은 한민족의 기개와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하고 일제의 세계침략에 경종을 울린 대한인의 자랑”이라며 “장군의 발자취와 가르침을 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단체의 출범은 알렸지만 조직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사업회는 이사장 선임 등의 절차를 거쳐 ‘백야김좌진장군학술문화사업회’라는 이름으로 올해 안에 설립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사업회는 매헌윤봉길월진회 양복모 이사(62)가 사무총장을 맡아 정식 단체 인가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양 총장에 따르면 사업회는 이사 10명과 15개 시·군의 문화원장을 포함해 35명의 학계 및 직능별 전문가 등 50명의 자문위원을 선정했다. 15개 시·군에서 운영위원으로 100명이 참여한다. 또 도민참여단 1000명을 모집 중인데 현재(11월)까지 900명 가까이 모였다. 현재 공석인 이사장 자리는 곧 선임될 예정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와 싸운 많은 열사들이 있다. 그런데 적은 숫자로 일본의 대규모 정규군대를 무찌르며 항일무장독립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좌진 장군의 면모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양승조 지사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가치관을 220만 도민과 공유하고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양 총장이 말하는 설립추진 배경이다.

그런데 이미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존재하는데 굳이 이름도 비슷한 기념사업회를 또 만들 필요가 있을까? 양 총장은 “전승기념사업회는 김좌진 장군과 관련한 학술·문화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말대로 사업회는 첫 사업으로 충남의 독립운동가와 관련한 학술포럼을 준비하고 있다.

양 총장은 사업회 일을 맡기 전까지 20년 넘게 홍성지역에서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충남 예산이 고향인 양 총장은 1981년 지방공무원 7급 공채로 임용된 후 원래 도립의료원이었던 홍성의료원이 1987년에 지방공사로 전환되면서 이때 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겨 2018년 정년퇴임 때까지 근무했다.

홍성의료원으로 소속을 옮긴 그 이듬해에 양 총장은 의료원 노조활동에 나섰는데, 이때부터 그의 20년 노동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홍성의료원 노조에서 2대부터 4대까지 위원장을 맡으면서 전국지방공사 의료원노동조합 협의회 의장과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전국민주노총 대전충남북 수석부본부장을 역임했다.

양 총장은 현재 전국의 노조가 있는 의료원들은 전부 자신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말한다. “전국 의료원 34개 의료원 노조 중 27개 노조를 내가 만들었다. 그리고 대전충남지역 의료원 노조는 순천향대만 제외하고 전부 내가 만들었다고 보면된다.”

40년 가까이 홍성과 인연을 맺고 살아온 그는 치열한 의료원 노조활동을 통해 홍성지역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산증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노동운동에 투신할 당시 홍성지역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민주노총이라는 것이 충남에는 홍성의료원밖에 없었다. 당시 전기통신노조가 있긴했는데 별로였고, 홍성의료원 노조가 가장 활발히 활동했다. 홍성 택시3사, 홍주여객, 농민회 등 약 16개 단체를 아울러 홍성지역 노동조합협의회를 만들어 지금 홍문표 의원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양 총장이 특별히 기억하는 일이 있다. 김영삼 정부 때 일이다. 1997년 1월 국회에서 노안법(노동법·안기부법)이 날치기로 통과되자 전국적인 항의시위가 잇따랐는데, 당시 홍성지역에선 오광은 목사와 고광성 원장이 각각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양 총장은 노동계를 대표해 ‘노안법 날치기 반대투쟁’ 선봉에 섰다.

“마침 그해 5월 세계노동절 기념 대회에 권영길 대표와 함께 산별대표로 가기로 했었는데 비자가 나오질 않았다. 당시 경찰서에서 출두하라고 했는데, 출두하지 않았다. 주로 내가 타겟이었다.”

양 총장은 그 일로 홍성경찰서에서 자신을 구속시키려고 했으나 당시 이완구 국회의원과 담판을 벌여 구속은 면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사업회' 양복모 사무총장. 사진=황동환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사업회' 양복모 사무총장. 사진= 황동환 기자

양 총장의 노동운동은 이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노동운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임금 보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로서의 인간다운 삶,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괴리에서 오는 여러 탄압 등을 해소, 완화시켜 인간의 권리를 회복시키자는 것이다. 독립운동가가 추구했던 정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 총장에게 독립운동가의 정신은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홍성군 홍주읍성에 성벽 밖에 세워진 '백야 김좌진 장군' 흉상. 사진=황동환 기자
홍주읍성에 세워져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 흉상. 사진= 황동환 기자

“당시 일본의 침략, 억압과 착취로 인해 우리 민족구성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당연히 국가차원의 분명한 사과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 다만 피해의식에서 이젠 벗어나야하지 않겠나? 어떤 분야에서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는 만큼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식민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가 아니다. 독립운동가 정신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전진해야한다.”

양 총장은 또 “학술·문화사업을 통해 김좌진 장군의 정신을 새롭게 조명해 국민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싶다”고 전했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마음가짐은 1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좌진 장군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사업회'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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